중국판 '반지의 제왕' 꿈꿨지만... 참담한 결과물

김성호 2024. 1. 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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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39] <봉신연의: 조가풍운>

[김성호 기자]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드는 돈은 얼마일까. 톱스타가 여럿 출연하고 촬영기간도 긴 블록버스터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게 일반적이다. <외계+인 2부>의 경우 370억 원, <노량: 죽음의 바다>는 300억 원, <서울의 봄>은 230억 원을 들여 만들어졌다. 그 결과로 500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이 들어야만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이중 <외계+인 2부>는 손익분기점이 무려 700만 명으로 알려져있다. 5000만 명을 조금 넘는 국민 가운데 700만 명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장의 규모는 곧 영화 제작 규모로 직결된다.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쉽게 드는 시장을 가졌다면 300억 원 정도의 투자를 받는 영화도 훨씬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SF, 대하 사극 등 제작비가 많이 드는 작품이 쉽게 나오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은 그저 수준급 작가의 부재로만 설명될 수 없다.
 
 영화 <봉신연의: 조가풍운> 포스터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5400억 원 들인 초대형 블록버스터

관객 수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 중국이다. 2021년 개봉한 <장진호>가 할리우드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전 세계 흥행수익 2위를 기록할 만큼 독보적 규모의 내수시장을 가졌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영화는 갈수록 그 규모를 키우고 있다. 할리우드는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크게 뒤처졌던 기술력까지 많이 보완되어 적어도 특수효과와 촬영에 있어선 아시아 최고수준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은 역시 각본이다. 기술적 측면은 쉬이 따라올 수 있으나 계량화하기 어려운 자산은 쉽게 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부족한 시나리오 속에서 기댈 것은 역시 고전이다. 제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응축돼 빚어낸 고전은 시대와 형식을 뛰어넘어 오늘의 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가장 길고 넓은 문화와 역사를 가진 중국이니만큼 그 고전 또한 상당한 힘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봉신연의: 조가풍운>은 무려 30억 위안 가까운 제작비를 들여 만든 초대작 블록버스터다.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5400억 원의 대작인데, 한국 영화 수십 편을 찍을 수 있는 돈을 한 편에 쏟아부은 결과물이라 해도 좋겠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명나라 때부터 전래돼 온 중국 고전 <봉신연의>를 극화했다.

널리 알려진 바, <봉신연의>는 중국 고대 왕조인 상나라와 주나라가 교체되는 이야기다. <서유기>와 같은 작품이 인기를 얻던 명나라 때 쓰인 소설답게 도사와 요괴 등이 등장하여 인간세상과 얽히는 과정이 색다른 재미를 준다. 일찍이 <서유기> 시리즈 등이 시도했던 영화화 작업은 인간과 수많은 요괴가 공존하는 세계관을 무리 없이 스크린 위에 옮기면서, 동양판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했다. <봉신연의: 조가풍운>이 노린 것이 꼭 그와 같아서, 영화는 규모나 이야기, 촬영기법 모두에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영화 <봉신연의: 조가풍운>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중국판 <반지의 제왕>을 꿈꾸다

이야기는 원작이 그러하듯 폭군 주왕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한다. 국왕의 작은 아들로 태어난 그는 태자가 된 형과 달리 변방을 떠도는 군인으로 성장한다. 특히 그가 이끄는 양자부대는 드높은 군기로 명성이 높다. 초기 봉건국가인 상나라는 제후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의 아들을 볼모로 도성에 잡아두는 정책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을 백인장으로 훈련시켜 이뤄낸 부대가 바로 양자부대인 것이다. 후에 주왕이 되는 왕자 은수가 볼모로 보내진 제후의 자식들을 제 양자로 삼은 게 그 이름의 이유다.

상나라 치세가 길어지며 곳곳에서 부조리가 심해진다. 그중 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은수는 제 정예병을 이끌고 기주를 쳐 반란군을 무찌른다. 살아남은 반란군은 산 높은 곳으로 도주하지만 은수가 끝끝내 추적하여 그 모두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척살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반란군 수괴의 딸을 포로로 붙잡으니 그 이름이 달기다.

흥미로운 건 달기가 그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산 중턱에서 펼쳐진 반란군과 진압군의 혈투 가운데 이 산에 봉인된 요괴가 깨어나 달기의 몸에 들어간 것이다. 승리를 거둔 진압군이 포로로 잡은 달기는 실은 인간을 해치는 여우요괴로, 그는 달기의 몸으로 은수에게 접근해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즉, 적자가 아닌 그에게 천하를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은수가 상나라를 얻게 되는 과정이며, 요괴에 현혹돼 폭정을 펼치는 이야기로 접어든다. 자연히 그 폭정에 맞서려는 이들이 생겨나고 영화는 원작이 그러했듯 무너지는 상나라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그린다.
 
 영화 <봉신연의: 조가풍운>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인간과 요괴, 신선이 뒤얽힌 판타지

나라가 흔들리면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는 법이다. 하늘에서 만민을 돌보는 원시천존은 은수의 만행과 폭정에 인간세상이 고통받게 될 것을 딱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인간들을 구할 절세의 비기 '봉신방'의 봉인을 풀어 천하의 주인될 자에게 건네려 한다. 하늘의 신선들 가운데서 이 중책을 받을 이로 지목된 것이 바로 강자아, 40년 간의 수련을 거듭해 신선계에 든 도인이다. 그가 두 제자들을 데리고 인간계로 내려와 봉신방의 주인 될 자를 찾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룬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대한 판타지 블록버스터의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기주성을 두고 펼쳐지는 공성전에서 시작하여 상나라의 권력을 탈취하는 왕자의 음모, 충신들을 척살하는 그의 폭정, 다시 요괴를 물리치려는 이들의 노력까지가 쉴 새 없이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익히 만나본 적 없는 다채로운 요괴가 등장하며, 개성 강한 인물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과정 또한 그려진다.

흥미로운 건 새로움이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인간 뿐 아니라 호빗과 드워프, 엘프와 오우거, 드래곤까지 다양한 종족이 공존하는 세계의 모험을 그려냈듯이 <봉신연의> 또한 평범한 인간들 사이 도술을 쓰는 도사들과 타고나길 특수한 역량을 가진 요괴들이 어우러지는 세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를 재료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낼 공간을 얻으니 초대형 판타지 블록버스터가 오로지 서양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 영화가 보여준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영화가 그저 가능성의 확인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주성치가 <서유기: 모험의 시작>을 통해 보여준 동양 판타지의 훌륭한 가능성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로 몸집만 불렸을 뿐이다. 기주성 공성전으로부터 시작하여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적잖은 신들이 지나감에도 20여 년 전의 영화를 뛰어넘는 요소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영화 <봉신연의: 조가풍운>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몸집만 키운 중국판 블록버스터의 초라함

한때 세계영화를 선도했던 홍콩영화계의 액션이 무색하게 <봉신연의: 조가풍운>의 액션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등장하는 무기 또한 청동검과 투석기 정도로 단순하고, 배우들은 그저 외양과 인기로 선정됐을 뿐 몸에 익힌 무술이 없는 듯이 투박하기만 하다. 명나라 때 쓰인 소설의 구성보다 얼마 나아가지 못한 이야기는 반란의 진압부터 역모, 폭정, 심판 등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에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뿐이다. 참신함 없는 나열식 전개가 지루해질 즈음 등장하는 대격전 또한 들인 돈을 감안하면 이렇다 할 특별함을 주지 못해 실망스럽다.

제작과 각본 등에서 할리우드의 이름난 거물들의 조언을 들었다곤 해도,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피터 잭슨이나 <서유기: 모험의 시작>의 주성치처럼 작품을 책임지고 각별히 공을 들인 이가 없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느껴진다.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설정도 <봉신연의: 조가풍운>을 시대를 넘어 기억되는 걸작으로 만들어낼 만큼은 되지 못한다. 그저 시종일관 시끄럽고 장대한 평범한 작품이 되었을 뿐이다.

중국 영화계는 이미 오우삼의 <적벽대전> 시리즈로 고전의 실사영화화 작업을 크게 그르친 바 있다. 김용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천룡팔부>도 기대 이하의 성과를 보였고, 수많은 작품 가운데 오로지 <서유기>만이 제 가치를 증명했을 뿐이다. 장대한 시리즈의 서장을 표방한 <봉신연의: 조가풍운>이 그중 누구의 걸음을 따를 지는 명백해 보인다. 갈수록 규모에 집착하는 중국영화들을 보자면 중국 영화인들은 여전히 제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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