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린 돈만 몇조인데…"후티와 싸워달라"는 美, 골치 아픈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 등 서방과 예멘 후티 반군과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어서다. 서방은 후티를 억제하기 위해 사우디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사우디는 자칫 지난 8년간의 ‘예멘 내전’ 수렁에 다시 빠지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후티가 지난해 11월 홍해 선박 공격을 시작한 후 서방은 사우디를 향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지난 8일 사우디를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빈살만 왕세자를 만나 홍해 안보 문제 등을 논의한 뒤 “여러 나라가 후티의 공격이 계속될 경우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을 거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미 외교전문 매체 포린폴리시(FP)는 “블링컨의 방문은 분쟁 억제를 위해 사우디가 나서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독일 연방안보위원회(BSR)도 지난해 말 사우디에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IRIS-T를 수출하는 걸 허가했다. 지난 2018년 이후 사우디에 가했던 무기판매 금지 조치를 해제한 것이다. IRIS-T는 독일 등 유럽 4개국이 함께 개발한 전투기 유로파이터에 탑재해 쓰는 무기다.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도 지난 7일 “유로파이터의 사우디 수출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우디가 이스라엘을 비롯한 관련 지역 내 충돌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다. 사우디는 최근 보유하고 있던 유로파이터와 IRIS-T로 후티가 이스라엘을 향해 쏜 미사일을 격추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이 사우디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중동에서 후티와 맞설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라서다. 사우디는 지난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예멘 정부군과 함께 후티와 전쟁을 벌였다. 누구보다 후티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서방 입장에선 사우디가 후티의 근거지인 사나를 비롯한 예멘 남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도 전략적으로 큰 이점이라 여긴다.
하지만 정작 사우디는 서방과 입장이 다르다. 지난 12일 사우디 외무부는 미국과 영국군이 후티 반군 근거지를 공습한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자제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사우디는 지난해 4월 후티의 예멘 북부 통치권을 인정하는 등의 조건으로 후티와 휴전하고,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11월 후티의 홍해 선박 공격, 올해 1월 미국의 후티 공습이 벌어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빈살만 왕세자는 10년 가까운 후티와의 전쟁으로 수십억 달러의 군사비용을 지출하고 안보 위협에 직면했다”며 “사우디로선 후티를 억제하는 것보다 역내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FP는 “후티에 대한 서방 공격은 사우디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라며 “미국은 도리어 사우디에 후티와의 평화 회담을 잠시 멈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 전했다.
후티와 갈등이 커질 경우 빈살만이 추진하는 ‘비전 2030’ 프로젝트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빈살만은 석유 이외의 산업으로 사우디를 세계 경제 중심지로 변화시키려 한다. 이를 위해 홍해 인근에 네옴시티 등 신도시를 건설해 물류 허브와 관광지 등을 만들 생각이다.
미국에 대한 불신도 사우디가 후티에 침묵하는 이유다. 미국은 예멘 내전 과정에서 사우디의 지원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2019년 사우디 내 정유시설은 후티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당시 사우디는 미국이 자국 안보를 책임져주지 못함을 절감했다.
이후 사우디는 후티의 배후에 있던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며 전략을 수정한다. 로이터 통신은 “사우디는 이란과의 적대 관계 청산을 통해 예멘 내전에서 발을 빼고 후티로 부터 자국 안보를 지키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후티는 홍해 선박을 공격하면서도 사우디 영토를 타격하진 않고 있다.
하지만 마냥 후티를 방관할 수도 없다는 점이 빈살만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미국이 계속해서 후티를 공격할 경우 사우디나 바레인 등에 있는 미군 기지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있어서다. 잠시 중단된 이스라엘과의 수교 협상을 사우디가 재개할 경우 이를 명분 삼아 후티가 사우디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
여기에 후티를 지원하는 이란마저 이라크·파키스탄 등을 공습하며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FP는 “홍해 갈등이 커질 경우 사우디가 추진해 온 예멘 내전 평화협상도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사우디에 유리한 옵션이 줄어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관계 정상화는 하마스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핵심 요소이며 중동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요소라고 아이작 헤르조그 이스라엘 대통령이 18일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 연설에서 말했다. 헤르조그 대통령은 "아직은 미묘하고, 깨지기 쉬우며,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양국 관계 정상화야말로 실제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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