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철 칼럼] 활개치는 산업스파이, 먹잇감 되는 한국
나치 만행 가담한 과학자들
데려가 자국 기술 육성 활용
중국은 미·소 냉전 역이용해
미국의 과학기술 무더기 전수
지금도 기술 탈취 시도 이어가
세계적 기술 보유한 우리나라
손쉬운 기술 탈취 먹잇감인데
정부와 법원 너무 안이해 걱정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부터 미국이 실행한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 나치 독일의 과학자, 공학자, 엔지니어와 가족들을 미국으로 빼돌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영국 런던 시민 수만명을 죽인 히틀러의 비밀 무기 V-2 로켓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과 쿠르트 데부스, 아서 루돌프 등 로켓 기술자 130여명도 그 때 미국에 갔다. 아서 루돌프는 나치 독일에서 작업이 부진한 유대인의 목을 매달았던 인물이고 폰 브라운은 방관자였다. 하지만 이들은 미 항공우주국(NASA)에 근무하면서 1969년 아폴로 11호의 추진 기관인 새턴 5호 개발에 성공해 미국의 인류 최초 달 착륙을 가능케 했다. 끔찍한 나치 전범들이 미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지금도 미국에선 과학기술 확보를 빌미로 나치의 만행을 덮어 준 반인륜적 처사란 비판이 여전하다.
당시 미국은 이들 외에도 1500명가량의 독일 과학자를 데려갔다. 나치 독일의 화학전 총괄 책임자로 사린가스를 공동 발명한 오토 암브로스도 미국 화학회사 등에서 일했다. 독일 과학자들은 우주항공, 군사, 의학, 화학 등 여러 분야에서 초강대국 미국 건설에 기여했다. 물론 영국과 러시아도 나치 독일에서 지식재산 탈취에 혈안이 돼 있었다.
지금 미·중 기술전쟁이 치열하지만 현재의 ‘공룡’ 중국을 만든 건 미국이었다. 중국은 1960년대 말부터 미·소의 냉전 관계를 이용해 미국 과학기술을 빼내는 전략을 추진했다.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온화하고 유쾌한 중국인의 이미지를 심어주며 미·중 관계를 급진전시켰다. 그 해부터 5년간 2만명의 중국 학생이 미국으로 건너가 물리학, 보건과학, 공학 분야 등에서 공부했고 그 숫자는 계속 늘었다. 1981년에 미국은 선진 육해공 전략 및 미사일 기술을 중국에 판매했고, 1986년에는 중국이 유전공학, 지능형 로봇, 자동화, 생명공학, 레이저, 슈퍼컴퓨터, 우주 기술 분야 등 핵심 국가연구센터 8곳을 설립하도록 지원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과학기술을 전수해준 셈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현대화를 도우면 중국도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될 것으로 믿었다. 1989년 6·4 천안문 사태가 있었지만 미국은 지원을 계속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기술을 전수해 준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뒤늦게 중국을 견제하려 했으나 때를 놓쳤다. 이미 미·중 경제는 서로 혈관처럼 얽혔고, 미국 대학에 교수로 뿌리내린 중국계 학자도 1300명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첨단 기술 탈취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요즘 미·중 무역전쟁이 치열해지자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대만의 반도체 회사 TSMC는 어떻게 될지 설이 분분하다. 대만 언론은 미국이 TSMC 엔지니어들을 대거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대만의 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미국에 복제하고, 기존 TSMC 시설을 파괴해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넘어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얘기다. 과거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이 연상된다. 이는 강대국들의 첨단기술 확보전이 얼마나 냉혹한 지를 보여주는 가설들이다.
미·중 기술전쟁이 격화되면서 우리나라가 기술 탈취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최근 중국 창신메모리에 취업해 18나노급 D램 핵심기술을 넘긴 삼성전자 부장급 직원 등이 구속됐다. 대형 조선업체 전 직원들이 잠수함 설계도면을 대만으로 유출한 사실도 드러났다. 또 LG·삼성·SK의 최첨단 배터리 기술을 겨냥한 중국의 산업스파이 활동도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중국 본토로 인력을 데려갔으나 최근엔 한국 내 법인에 국내 연구진을 채용해 기술을 빼돌리는 대담한 수법도 동원된다. 반도체와 2차 전지, 수소, 조선, 철강 등에서 첨단 기술력을 갖춘 우리는 기술 탈취의 먹잇감으로 노출돼 있다. 사실 국내 배터리 3사나 반도체 회사들이 미국에 등떠밀려 현지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 것도 기술 유출 측면에서 걱정된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기술 유출 피해는 25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반도체 공장 설계도면 등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삼성전자 전 임원은 곧 보석으로 풀려나는 등 법원은 기술유출 범죄에 너무 관대하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개발한 기술이 유출된다면 우리 경제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강대국들은 치밀하게 기술 탈취를 시도하는데, 우리는 눈뜨고 당해야만 하나.
노석철 논설위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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