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무전공 입학제, 기초학문 보호책도 세워야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가 어느 시대보다 빠르다. 이에 더해 저출산에 따른 학생 수 급감으로 대한민국 대학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혁신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대학과 현상유지 대학의 격차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지난해 대학가의 최대 관심사는 비수도권 대학을 대상으로 5년간 1000억원을 지원하는 ‘글로컬 대학 30 프로젝트’였다. 첫해에 선정된 10개 사업단의 특징을 보면 대학 간 벽 허물기(통합), 대학 내 학과의 벽 허물기(무전공 입학과 편제 조정), 대학과 지역사회의 벽 허물기(지·산·학 연계)로 요약할 수 있다. 대학 혁신의 화두는 경직된 구조, 즉 벽을 허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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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학 뒤 적성 맞는 전공 선택 가능
인기학과 쏠림 부작용 가능성도
무전공 학생 위한 진로 지도 필요
」
무전공 입학이란 ‘전공을 지정하지 않고 입학한 뒤에 1년 정도 전공 탐색 기간을 보내고 각자에게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제도’다. 국내외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시대적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산업계의 인력 수요는 변화무쌍한데 대학의 학과별 정원 구조는 경직적이기 때문에 인력 수급의 불일치가 심각하게 발생한다.
대학의 학사 구조, 학과별 정원을 바꾸는 것은 대학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탄력적인 정원 조정도 거의 불가능하다. 무전공 입학 제도는 정원의 일정 비율을 산업계 수요가 반영된 학생의 선택에 따라 유연하게 운영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학생 본인이 원하는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평생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하지 않는 전공에 입학할 경우에는 극복하기 힘든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잘못된 선택이 평생 고통과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 학생과 학부모는 대학 졸업 후의 진로를 위해 학과 진입의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원하는 전공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면 재수와 삼수로 내몰린다.
고교를 졸업할 때 아직 전공을 확정하지 못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입시 공부에 집중하다가 막상 학과를 선택하는 단계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대학 입학 후에 적성과 흥미에 맞는 전공을 찾아 선택해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무전공 입학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대학은 이런 목소리를 경청하고 제도 도입과 추진 과정에서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인기학과 쏠림 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취업률이 낮은 기초학문 분야에 타격이 생길 수 있고, 결과적으로 국가 경쟁력 약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무전공 입학 학생 비율을 과도하게 높일 경우에는 실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의 정원 규모에 맞게 적정한 수준으로 무전공 비율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대학별로 기초학문 분야가 보호될 수 있는 ‘균형 발전 계획’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무전공 학생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면 소속감이 낮아지고 자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무전공 입학 학생들이 진로를 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담 조직, 교수와 멘토링 조교, 관리 예산을 함께 계획해야 한다. 무전공 학생이 전공을 선택한 이후에도 기존 학생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리도 필수적이다.
실패한 학부제처럼 무전공 입학 이후 1학년 성적에 따라 학과별 정원에 맞춰 전공 선택을 제한하면 2학년 이후 원치 않는 학과에 배정된 학생들의 자퇴가 속출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학생의 전공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융·복합 시대를 맞아 지금처럼 대학들의 경직된 학과 편제로는 산업계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유연한 학사제도로 학생을 교육해야 한다. 입학·재학·졸업의 모든 과정에서 학생의 선택권이 최대한 보장되고, 전공과 진로의 설계가 자유로워지도록 해야 한다. 졸업 후에도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구조를 혁신하는 대학이 미래를 선도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제 대학 발전을 위해 구성원들이 마음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학교 안팎의 벽을 허물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 모두가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시점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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