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의 시선] 70대 할머니의 울분

김창규 2024. 1. 1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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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 경제에디터

박정숙(가명) 할머니는 올해 75세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그는 젊은 시절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혼자 살다 보니 노후가 불안해서다. 아파트 한 채도 마련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파트는 임대를 주고 방 두 칸짜리 빌라로 옮겼다. 외식은 거의 하지 않았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한푼 두푼 모아 저축했다. 시간이 지나고 은행에 돈이 어느 정도 쌓이자 마음이 놓였다. 주택 이외에 전 재산을 예금으로 두고 있으니 은행에서 VIP 대접을 해주었다. 2년 6개월 전 어느 날 은행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금 금리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내는 투자 상품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 ELS 사태로 평생 모은 돈 반토막
판매액 30% 이상이 고령층 대상
금융소외 고령층 보호 제도 필요

당시 금리는 1%대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역사적인 저금리’ 시대였다. 3~4%가량의 높은 수익률이 나온다는 말에 솔깃했다. 이런 수익률이면 생활비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품 설명을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금융 거래할 땐 은행 창구만 찾을 정도로 금융지식이 부족한 박 할머니에겐 버거웠다. 기억에 남는 말은 “수익률이 괜찮고 안전한 편”이라는 설명뿐이었다. 요식행위라며 직원이 하라는 대로 서명을 했다. 이렇게 그의 모든 금융자산이 한 상품에 투자됐다.

그러던 지난해 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소식을 들었다. “이 상태로 내년(2024년) 상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면 원금이 반 토막 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었다. 그가 투자한 상품은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를 기초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이다. 기초자산 가격이 만기 때까지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원금과 미리 약속한 수익을 받는다. 하지만 당시 1만2000선에 달하던 홍콩H지수는 요즘 5000선을 맴돌아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크다. 은행 직원을 찾아가 “가입할 때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고 따졌다. 하지만 은행 직원은 “모든 상품 설명을 했고 고객이 ‘충분히 설명을 들었다’고 서명까지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박 할머니는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가입 때 은행 직원이 간단히 서명 등을 하면 된다고 하며 내민 서류가 떠올랐다.

박 할머니 사례는 한국 금융시스템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은행 서류상으로는 박 할머니가 원금 손실을 감수할 만한 투자 성향이 있고 고위험 파생상품에 대한 금융지식도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투자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금융소비자보호법엔 금융투자업자가 일반 투자자에게 투자를 권유할 때 지켜야 하는 6가지 의무가 명시돼 있다. 설명의무, 적합성, 적정성, 불공정영업행위 금지, 부당권유행위 금지, 허위·과장광고 금지다. 이 중 하나라도 위반하면 불완전판매다. 박 할머니의 경우 6개 의무 중 하나라도 제대로 지켜졌을까. 형식상으론 합법이지만, 내용상으론 불법일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일부 금융회사는 고위험 상품 판매를 직원의 핵심성과지표(KPI)로 정했다. 이 상품을 한도도 없이 마구 팔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금융회사 직원에겐 상대적으로 금융지식이 부족하고 현금 보유성향이 강한 고령층은 공략하기 쉬운 ‘호갱’이었다. 지난해 11월 15일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홍콩H지수 ELS 판매액은 5조4000억원으로 개인 투자자(17조7000억원)의 30.5%에 달한다. 이달 들어 만기가 도래한 홍콩H지수 ELS의 손실률은 50%를 넘어섰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금액만 15조원이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빨라지고 있다.

물론 이 문제가 금융회사 탓만은 아니다. 금융회사의 과도한 실적주의, 노령층의 금융소외, 금융당국의 무관심이 빚은 합작품이다. 금융상품 불완전판매 논란은 잊을만하면 반복되고 있다. 2008년 키코(KIKO) 파생상품, 2011년 저축은행 후순위채, 2013년 동양그룹 기업어음(CP) 사태 등….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금융당국은 대책을 마련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금융의 디지털화가 확산하면서 고령층의 금융소외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이미 주요 선진국은 고령층의 금융소외를 막기 위해 앞다퉈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은 2018년 금융거래 때 고령층을 보호하는 고령자안전법을 제정했고 영국은 2019년 취약고객 공정대우 지침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한국은 고령층 금융교육을 위해 경로당 등과 연계해 ‘찾아가는 합동교육’을 하는 정도다. 내용도 보이스 피싱 예방, 착오송금 반환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ELS 사태를 개인의 책임이라고만 돌리기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김창규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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