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수근의 마지막 주택, 고석공간

윤정훈 2024. 1. 19.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근대주택, 고석공간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
「 고석공간 」
건축가 김수근의 마지막 주택.
작은 툇마루가 있는 한실과 모던한 나선형 계단이 공존하는 2층.

김수근을 생각하면 크고 웅장한 건물이 먼저 떠오른다. 경동교회와 자유센터, 세운상가, 올림픽주경기장 등을 설계하며 한국 근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건축가. 그가 작고하기 3년 전인 1983년, 명륜동 골목 한쪽에 주택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누나 김순자와 매형 박고석을 위해 지은 ‘고석공간’ 이야기다.

벽돌에 목재를 둘러 독특한 파사드가 인상적인 외관.

집을 설계해 달라는 누나 김순자의 부탁에 “내가 지으면 불편할 것”이라고 하니 “불편을 멋으로 여길 테니 마음껏 지어보라” 했다던 일화가 전해진다. 김수근이 품은 가족에 대한 애정과 건축을 예술로서 다루려는 의기가 만나서일까. 집은 비슷한 시기에 지은 대형 건축물과는 다른 아우라를 풍긴다. 견고하게 쌓은 벽돌 건물을 10여 년간 공들여 말린 미송으로 두르는가 하면, 콘크리트 천장과 격자문이 공간에 웅장함을 더해준다. 여기에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오르면 나타나는 작은 한실까지. 동서양의 건축 요소가 뒤섞여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고석공간이 특별한 이유는 건축뿐 아니라 집의 내력에도 있다.

나무 틀로 짠 격자문이 있는 전실.

김순자는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한국 최초로 의상 쇼를 열었던 1세대 의상 디자이너이며, 박고석은 이중섭의 절친이자 ‘산의 화가’로 불리는 한국 대표 근대 화가다. 박고석은 이곳에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며 1층 응접실에서 고은, 박경리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와 교류했다. 산을 흠모하며 지하실에서 붓질을 이어가던 남편도, 매일같이 집 안 곳곳을 쓰다듬으며 이곳을 아낀 연로한 아내도 더는 세상에 없지만 집은 본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보금자리로 선택한 전정아 · 황정욱 부부 덕이다.

현관과 거실 사이에는 박고석 화백의 컬렉션이 놓였다.

Q : 어떤 계기로 이 집에 살겠다고 마음먹었나

A : 결혼 후 줄곧 아파트에 살았다. 업무상 미국에서 몇 달 거주하다 귀국해 이사할 집을 찾던 중 우연히 기사를 통해 고석공간을 접했다. 개인적으로 사대문 안의 단독주택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런 집을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김수근의 작품으로서는 마지막 주택이지 않나. 보존을 위해 애당초 개인에게 팔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김수근에 관한 서적을 살피고 레너베이션에 관한 자문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김순자 여사를 만나 있는 그대로 집을 아끼겠다는 마음을 전달했다. 우리가 지내는 동안 이곳은 계속 고석공간일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얼굴이 환해지시더라. 그만큼 각별했던 집이었던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 격자 보 구조를 그대로 노출시킨 천장. 그 아래로 격자 구조의 한지 미닫이창이 이어져 강렬한 인상을 만든다.

Q : 역사적 · 건축적으로 의미가 크지만, 직접 들어와 살기엔 부담이었을 것 같다

A : 처음 고석공간을 접해 매입하기까지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집을 공공재로 생각했다. 박노수미술관, 최만린미술관 등 최근 수도권 소재의 많은 역사적 근대 주택이 일반에 개방되는 추세다. 이 집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껏 고치기보다 집에 우리 삶을 맞추기로 했다.

기도실로 쓰이던 2층 한실. 댓돌처럼 놓인 나무 토막을 밟고 공간을 오르내렸을 김순자 여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Q : 문화재 보존 관련 학예사에게 집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고 들었다

A : 이 집의 존재를 알고 나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품은 때가 있었다. 추후 서울시 미래유산이나 등록문화재로 선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니 구조체 변경을 지양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구조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건축에 대해 공부하곤 했다.

고석공간의 거실.

Q : 복원에 초점을 두되 일부는 현대에 맞게 고친 것으로 안다. 공사는 어떤 기준으로 진행했나

A : 오리지널 디자인의 가치를 품고 있다고 생각되는 요소는 그대로 두었다. 다만 2층에 주방이 있는 건 현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다소 맞지 않아 1층 포치를 실내로 편입시켜 주방공간으로 활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추후 복원 가능성이었다. 불가피하게 리모델링을 하더라도 복원 가능한 선에서만 진행했다. 주방 수납장을 떼어내거나 벽지 등 마감재만 교체했고, 이 역시 본래 디자인의 연속선상에서 재료를 택했다. 1층 거실 한쪽은 박고석 화백의 그림을 보관하던 작은 수장고였는데, 수납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을 보관해 두었다.

박고석 화백의 풍경화 ‘울산바위’.

Q : 긴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곳이다. 이런 집에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A : 집이 아니라 집의 내력을 샀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내 집 같은 느낌은 덜하지만, 매 순간 보람과 경이를 느낀다. 이곳에 들어와 살기 전 몇 군데 보수가 필요해 목수를 모셨는데, 전국의 많은 집을 보고 다닌 그분도 감탄하더라. 40년 된 집임에도 목재 하나 틀어지지 않은 게 놀라웠던 모양이다. 벽돌과 계단 역시 건축 당시 그대로 여전히 견고하다. 깊은 시간에서 오는 아우라와 편안함, 아늑함이 느껴진다.

벽돌의 질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계단실.

Q : 앞으로 계획은

A : 80년대에 지은 집이라 전기공사가 필요해 계획 중에 있다. 둘이 지내기엔 다소 넓어 공간 활용 역시 고민이 필요하다. 몇 해 전 원형 복원을 마치고 개관한 딜쿠샤처럼 이 집 역시 100년이 지나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여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

그 위로 난 격자형 천창.
기존 문을 보관해둔 지하.
2층 한실 앞 공간과 미닫이문.
박고석의 작업실이었던 지하 서재.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