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간첩 전성시대…“산업기밀 유출 막는 형법 개정 시급”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23년 7월까지 탈취된 첨단기술 552건의 피해 규모는 100조원을 넘어섰다.
기술유출은 단순히 기업의 손익에 그치지 않고 국가 안보와 국익을 위협하는 간첩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법적 제도가 아직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18일 열린 ‘국가안보 직결되는 국가기밀 탈취-외국 간첩 전성시대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에서는 국가 핵심정보에 해당하는 산업기밀 탈취행위에 대한 간첩죄 적용범위와 개정방안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김영주 국회부의장,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이상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주최하고 쿠키뉴스가 주관한 이날 토론회에서는 국가 핵심기술의 해외유출에 대해 ‘경제 간첩죄’를 적용하고 있는 주요 무역 경쟁국들과 같이, 한국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산업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우리나라 형법은 1953년 제정된 이래 70여 년 동안 단 한 차례 개정도 이루어지지 않아, 간첩죄의 경우 우방과 적이 뚜렷이 구분되던 냉전시대의 ‘적국’ 개념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우방들 역시 사안마다 이합집산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 패권 시대에, 적국을 위한 간첩행위만을 상정한 기존 형법의 전제는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이 이날 토론회의 기본적인 공감대였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국가기밀 보호, 형법 98조 개정의 필요성’에 대한 발제에 이어 진행된 토론에서는 한국도 국민과 국익에 실질적으로 해가 되는지 여부에 따라 간첩행위를 규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 이어졌다.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 변호사는 형법 98조 개정안 통과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수정안의 적용범위와 대상에 대한 조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산업기밀이 해외로 계속해서 유출되고 있음에도 간첩죄가 아닌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이 적용되면서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되는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 변호사는 “해당 형법에는 국가기밀이라는 말이 언급돼 있지 않고 판례에 의해 개념설정이 돼 있어 산업기술이 국가기밀에 포함되는지 여부가 불확정적이고 애매하다”며 “특히 형법 98조 제1항 해석에서 국가기밀을 탐지 및 수집하는 행위를 간첩행위로 보고 있고, 2항의 누설행위는 이미 군사기밀을 갖고 있는 자가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굉장히 간첩행위를 좁게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등 해외 선발국의 경우 탐지행위 뿐만 아니라 수집과 누설, 중개, 전달, 파괴 등 다양한 행위에 대해 간첩행위로 규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형법에서도 이를 처벌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주장이다.
또 김 변호사는 “외국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단체에 대해서도 간첩행위로 처벌하지는 논의가 있었지만 과하다는 의견 있고, 다양한 간첩행위를 규정하는 부분에서도 처벌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며 “국가기밀을 탐지·수집·전달하는 행위 중에서 전달받은 자가 탐지 및 수집한 자보다 죄가 훨씬 중할 수 있는데, 사안별로 법문 적용을 달리 정해 형벌을 차등화하는 것은 부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추상적이고 일반화된 법문을 만들지 말고 실제 어떤 유출행위가 있는지에 따라 적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희주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안보개념이 포괄적으로 변하고 있고, 핵심 산업기술이 외국이나 단체에 유출될 경우 국가산업의 궤멸까지 불러올 수 있는 시대상에 따라서 국가제도 역시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강 변호사는 “미국은 외국기업이 기업을 인수할 경우 국가인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 판단되면 이를 제한하고 대통령 직속의 특별위원회에서 심사해 막고 있다”며 “소련이 해체된 후 미국연방법 외에 1831조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외국 정부 외에 외국의 기관도 대상으로 정했고 기밀 등급이 없는 정보의 경우도 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예를 들었다.
이어 “독일과 중국 역시 미국의 이러한 규정을 벤치마킹해 입법을 했기 때문에 세계적 트렌드이자 입법의 모범사례라 볼 수 있다”며 “우리나라 역시 이처럼 포괄적이고 다양하게 법문을 규정해 처리해야한다”고 말했다.
이근우 가천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법은 70년 전 일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어색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체계라며 시급한 형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법원이 노후화된 형법을 재량적 해석으로 맞추고 있는데 특히 추상적 단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예를 들어 형법에서 대상을 외국 및 외국인의 단체로 규정할 때 ‘국가에 준하는 단체’의 경우 무장단체에 불과한 ‘헤즈볼라’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개념 자체의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 또 조선업체의 임직원이 잠수함을 외국인의 단체에 팔고 이들이 다시 외국 정부에 팔았다면 단어 자체에 따라 법 적용 대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교수는 “특볍법으로 정하자는 논의가 있지만 원래의 형법이 아닌 예외로 처벌하자는 전례를 남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사후 처벌만이 아닌 사전 예방조치가 가능한 형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아 법무부 형사법제과 검사는 “법 적용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기밀 종류에 따라 형법적용이 다르고 불법성에 차이가 있어 개정안에서 외국 등에 한정하는 것으로 수정안을 논의 중”이라며 “다만 국가기밀 개념의 경우 이미 판례가 쌓여있어 불명확한 개념이라 보기 어렵고 형사 사법체계에서 실무 상 문제없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방국의 경우도 국가기밀이 아닐 수 있거나 공유할 수 없는 경우도 있듯이 형법은 상대국의 성격이나 사안에 따라 개별적, 상대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며 “국제 환경변화에 따른 개정의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있는 만큼 상호주의관점에 부합하도록 법무부에서도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토론에 참여한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이제는 국제사회가 기술과 산업의 공급망을 공유하는 시대가 아니라 패권화 되고 있고 기술의 선도국들은 첨단핵심기술을 국가안보로 규정해 관리하고 있다”며 “국가핵심기술은 국가의 자산이고 이것이 훼손되면 국가의 국력만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이 저하돼 국가 존립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는 만큼, 국가기밀 유출은 국가의 자산, 국가의 경쟁력, 국력의 관점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순영 기자 binia96@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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