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건설사 직원도 뜻 모르는 아파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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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인 우리나라에서 첫 브랜드 아파트가 등장한 건 25년 전이다.
한 건설사 직원한테 이런 아파트 이름의 뜻을 물으니 "나도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근에 만난 건설사 직원은 "건설사가 제안한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조합원들이 직접 작명소에 가서 아파트 이름을 수천만 원씩 주고 받아온 사례도 있다"고 했다.
이런 행태를 보다 못한 서울시는 건설사들과 함께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짓지 못하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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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인 우리나라에서 첫 브랜드 아파트가 등장한 건 25년 전이다. 롯데건설이 1999년, 서초 롯데캐슬84에 처음으로 ‘캐슬’이라는 브랜드를 붙였다. 84는 84세대를 의미했다.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집이란 느낌을 풍기도록 한 것이다. 이름에 대한 만족도는 ‘완판(완전판매)’이라는 성적으로 드러났다. 입주하는 날, 롯데건설은 유럽풍으로 웅장하게 꾸민 정문에 캐슬과 운을 맞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입성(入城)을 축하합니다’.
래미안·푸르지오·자이·아이파크. 이런 브랜드가 쏟아졌던 2000년대 초반 무렵 "아파트 이름들이 영어로 변하는 이유가 뭐냐"는 우스개 질문이 유행한 적이 있다. "시골 시부모님이 못 찾아오시게 그렇게 짓는다"는 답에 사람들은 혀를 찼다. 요즘 아파트 이름은 부모님에게만 어려운 게 아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조차 술 한잔하고 택시를 타면 정확하게 말하기 힘들 정도다. ‘디에이치 에델루이’ ‘푸르지오 클라베뉴’ ‘힐스테이트 블랑루체’ ‘자이 브리에르’ ‘더샵 엘테라스’까지 다양하다. 한 건설사 직원한테 이런 아파트 이름의 뜻을 물으니 "나도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공원 옆이면 ‘포레’, 강을 끼면 ‘리버’, 지하철 근처면 ‘메트로’. 이런 공식도 한물갔다. 영어와 불어, 이탈리아어까지 다 합쳐 조합어를 만드는 게 최신 유행이다. 이러다 보니 미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들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이름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절반이 넘게 사는 아파트의 이름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내가 사는 곳은 나의 지위를 보여준다’는 인식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강남 3구 재건축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건설사들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원은 ‘하나의’, 베일리는 ‘성곽 내 안뜰’ 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삼성물산에서 먼저 제안했다. 성 안에 사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에 주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는 원베일리 이름을 딴 수제 맥주까지 나왔다. 아파트 전경이 그려져 있는데 1캔당 4500원에 원베일리 상가에서 판다.
아예 조합원들이 이름을 정하기도 한다. 최근에 만난 건설사 직원은 "건설사가 제안한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조합원들이 직접 작명소에 가서 아파트 이름을 수천만 원씩 주고 받아온 사례도 있다"고 했다. 조합원들이 갑일 때는 건설사들도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런 행태를 보다 못한 서울시는 건설사들과 함께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짓지 못하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 건설사들은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건설사보다는 조합원들이 아파트 이름을 좌지우지하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짧고 쉬운 이름을 쓰자고 한들 "내가 살 집 이름도 내 마음대로 못 짓게 하냐"는 타박 앞에서는 기를 펴기 힘들다.
건축가 유현준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아파트는 골목 대신 복도로 이동하는 공간을 만들었고, 그 결과 하늘이 사라졌다’고 했다. 도시인들이 고개를 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하늘이 아니다. 고층 아파트와 벽면에 사방팔방 새겨진 브랜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고급스러워야 한다 → 고급스러움의 기준은 남다름이다 → 남달라지려면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의식의 흐름이 외계어를 만들어냈다. 아파트 이름을 쉽게 지으라는 건, 재건축 사업지의 층수를 낮추라고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심나영 건설부동산부 차장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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