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보요원과 외교관은 역할이 다르다

2024. 1. 18.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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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미국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냉전 시기 미·중 수교와 미·소 데탕트를 이끈 ‘외교의 거목’ 헨리 키신저(1923~2023)가 생전에 했던 명언이다. 그는 “우호적인 국가는 있어도 우호적인 정보기관은 없다”는 금언도 남겼다.

2018년 영국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른 『스파이와 배신자』는 역시 냉전 종식을 앞당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소련 KGB와 영국 MI6의 이중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86)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담고 있다. 직업으로서 외교관과 스파이는 국가안보와 국익 수호라는 궁극적 목표는 일치하지만, 활동 방식은 전혀 다르다.

「 신임 국정원장, 조직 안정 시급
국가정보기관 위상 재정립하고
대공수사권 이관 공백도 메워야

시론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는 ‘손님의 벗’을 뜻하는 프록세녹스(Proxenos)가 존재했다. 겉으로는 자신의 출신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을 보살피는 일을 맡았지만 실제로는 그곳 정세를 고국에 전달하는 스파이 역할을 했다. 상주 외교관의 기원은 근세 초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의 주요 임무도 외교 활동 못지않게 주재국의 동향을 은밀히 파악해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외교와 스파이 활동에 구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근세 유럽 국가에서 비밀 첩보기관이 생겨나면서부터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비밀첩보대, 프랑스 루이 13세의 ‘샹브르 누아(Chambre noir·암실)’ 등이 대표적이다. 19세기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1,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차원의 정보조직이 제 모습을 갖춰나갔다.

그 과정에서 각국 대사관에도 외교관 신분이지만 실제로는 정보기관에서 파견된 ‘화이트(White)’ 정보 요원이 생겼다. 냉전 시절 미·소 동서 진영에서는 적성국 외교관 중에 누가 스파이인지를 가려내는 일에 사활을 걸었다. 정상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 간에도 정보 협력을 목적으로 화이트가 교차 파견됐고, 그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김규현 원장에 이어 같은 외교부 출신인 조태용 신임 원장을 맞이하게 됐다. 1980년 외무고시(14회)로 외교관이 된 이후 외교부 1차관, 주미대사, 국가안보실장 등을 거치며 외교·안보 분야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굳이 전문성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관계 속에서 외교관과 스파이의 역할은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외교부는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만, 정보기관의 활동은 베일에 싸여 있고 화려하지도 않다. 외교관은 외교적 수사에 익숙하지만, 정보 요원은 공작 마인드로 무장하고 있다. 전임 원장이 조직 장악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이런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조 원장을 기용한 배경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국정원은 업무 영역이 축소된 데다 연이은 인사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우선 시급한 것이 조직 안정일 테지만 조 원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점에서 외풍만 잘 막아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보 요원은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각인할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정보기관으로서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최우선 과제는 대북 휴민트 복원, 국내 보안·정보 활동 중단과 대공수사권 이관에 따른 안보 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우크라이나를 얕잡아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하마스의 기습공격을 예측하지 못한 이스라엘 모사드의 정보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국제질서 급변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국정원만의 블루오션도 개척해야 한다. 북한은 새해 벽두부터 노골적 도발을 가시화하고 있다. 국정원은 테러와 산업스파이 등 초국가적 안보 위협은 물론이고, 미·중 패권 갈등에서 비롯된 신냉전까지 대처해야 하는 이중삼중의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시점에 “국정원을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초일류 정보기관으로 만들겠다”는 신임 원장에게 맡겨진 책무가 막중하다. 국민과 정치권도 힘을 보태야 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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