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대로 다 해봐…기획자 된 연주자들
젊은 연주자들에게 기획의 장이 펼쳐졌다. 대형 공연장들의 상주 음악가 제도를 통해서다. 연주자들에게 기획자, 프로그래머의 역할을 맡겨 그들의 음악적 색채와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인 피아니스트 김준형(27)은 올해의 주제로 ‘엽편소설’을 선정했다. 단편보다 짧은 소설의 이야기가 60분 정도의 공연 한 편에 담기는 장면을 상상하며 정한 주제다. 김준형은 지난 8일 기자간담회에서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작곡가 6명을 고르며 프로그램을 쌓아 올렸다”고 했다. 이달 11일 첫 공연에서는 바흐·베토벤 등 독일의 작품을 연주했고, 5월에는 일본 피아니스트 유키네 쿠로키와 이중주를 연주한다. 8월에는 플루티스트 김유빈, 첼리스트 문태국과 드뷔시를 들려준다. 마지막 공연인 11월에는 ‘종’이라는 주제로 직접 스토리를 만들어 종소리와 관련한 음악을 배치했다.
롯데콘서트홀의 상주 음악가인 첼리스트 한재민(18)은 10대에 국제 콩쿠르를 휩쓴 경력의 첼리스트다. 그는 홀로 무대에 오르며 공연을 시작한다. 3월 27일 여는 무반주 첼로 독주다. 존 윌리엄스, 가스파르 카사도, 죄르지 리게티, 졸탄 코다이의 독주곡들을 골라 2000석의 대형 공연장에서 혼자 연주한다. 10월에는 3중주다. 피아니스트 박재홍,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토프 바라티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드보르자크,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트리오를 들려준다.
마포아트센터에선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24)이 상주 음악가로 활동한다. 김동현은 4번의 각기 다른 무대를 기획했다. 7·9·10·12월에 열리는 독주회, 야외무대, 협연이다.
상주 음악가 제도는 미술 분야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작가들이 새로운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공간·자원을 제공한다. 한국의 상주 음악가 제도는 2013년 금호아트홀이 시작했다. 당시 금호문화재단의 음악사업 팀장이었던 박선희 전 국립심포니 대표는 “젊은 음악가들이 1년 동안 자신의 세계를 펼치면서 집중적으로 성장하고, 팬층도 집중적으로 발굴하는 개념이었다”고 소개했다.
금호아트홀은 그해 피아니스트 김다솔을 시작으로 선우예권·박종해, 바이올리니스트 박혜윤, 양인모,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등이 상주 음악가로 활동했다. 2019년 박종해는 ‘플레이 그라운드’로 한 해의 주제를 설정하고 변주곡만으로 구성된 무대 등을 마련했으며, 2021년 김한은 재즈 스타일의 음악까지 끌어들였다. 양인모는 2018년 상주 음악가로서 연주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녹음해 음반으로 냈다. 금호문화재단 음악사업팀의 김규연씨는 “솔로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 아티스트와 협업이 특히 중요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롯데콘서트홀은 2021년부터 상주 음악가인 ‘인 하우스 아티스트’를 선정했다. 피아니스트 이진상은 지난해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피아노 버전을 미디어 아트와 함께 무대에 올렸다. 당시 이진상은 “상주 음악가의 무대는 그동안 연주자도 잘 접하지 못하고 관객도 체험해보지 못한 시도를 할 기회”라고 했다.
해외에서는 공연장보다는 오케스트라, 음악 축제가 상주 음악가를 선정해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4/25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게 됐다.
상주 음악가의 관건은 음악가로서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주제와 방법이다. 뉴욕 필하모닉은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바흐의 독주곡부터 스페인 음악을 한 자리에서 소개하는 등의 음악 큐레이팅을 보여준다. 베를린필의 23/24 시즌 상주 음악가인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시빌리는 조지아 태생의 13세 피아니스트를 무대에 소개했다. 베를린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열두 살에 떠나온 고국 조지아에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클래식 음악 바깥의 분야에서 아티스트를 선정해 협업한다. 현 시즌의 상주 아티스트는 인도 악기인 ‘사로드’의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수미크 다타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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