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패키징·고객 맞춤 칩 그리고…과거와 달라진 반도체 부흥 전제 조건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4. 1. 1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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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영업 적자폭을 크게 줄이는 등 반도체 업황 반등론이 무르익는다. 반도체 현물 가격이 바닥을 찍고 소폭 반등하자 고정 거래 가격이 뒤따라 상승세다.

시장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가 집계한 PC용 D램과 메모리카드·USB용 낸드의 고정 거래 가격은 지난해 10월부터 3개월 연속 상승했다. 특히 반도체 시장 선행 지표로 통하는 D램 현물 가격은 지난해 9월부터 4개월 연속 반등세다. 현물 가격은 기업 간 계약에 따른 고정 거래 가격과 달리, 소비자가 직접 거래할 때 적용되는 가격이다.

통상 3개월 안팎 시차를 두고 고정 가격과 비슷한 흐름을 보여 대표적인 시장 선행 지표로 꼽힌다. IT 수요 침체로 지난해 9월 1.4달러대까지 추락했던 D램 현물 가격은 최근 1.7달러 선까지 회복했다. 2달러를 웃돌던 지난해 초보단 낮지만 상승세가 꺾이지 않는다는 점을 시장은 주목한다.

그러나 반도체 업황이 과거와 같은 반등 패턴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중론도 팽배하다.

당시에는 메모리 업체 간 감산 공조를 통해 누적된 재고가 감소할 것이라는 기대감만으로도 주가는 실제 업황보다 대략 6개월 선행해 반등하는 패턴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에 따른 HBM 시장 개화 등으로 메모리 반도체 산업 속성이 중앙집중적 생산 구조에 기반한 범용 비즈니스에서 주문형, 수주형 산업으로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달라지고 있는 반도체 산업 속성을 짚어보고 부흥 전제 조건을 분석한다.

[전제 조건 1] 서버 수요

DDR5 교체 가속 기대

과거와 달라진 반도체 부흥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서버 수요다. 2000년 이후 반등 국면에선 PC와 모바일 등 B2C(기업 대 소비자) 교체 수요가 업황 회복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B2B(기업 간 거래) 서버 수요가 핵심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2000년 중반 이후 크게 4차례 반도체 업황 부진과 반등 패턴이 나타났다. 2008~2009년(글로벌 금융위기), 2011~2012년(유럽 재정위기), 2015~2016년(유럽과 중국 경기 둔화), 2018~2019년(미중 무역 전쟁 발발) 등으로 구분된다. 세부적으로는 업황 부진을 초래한 요인과 반등 패턴이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제조사 공급 축소 → 재고 수준 정상화 → PC와 스마트폰 교체 수요 증가 → 북미와 중국향 서버 수요 회복 등의 경로를 거쳤다.

이 가운데 2024년 반도체 수요를 견인할 핵심은 서버 시장이다. 주요 3개 수요처 중 스마트폰과 PC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관련 시장이 포화 상태에 접어든 데다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구매 심리 위축으로 스마트폰과 PC 판매량이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3년 스마트폰 출하량은 2013년(10억4900만대) 이후 10년 만에 가장 적은 11억6000만대에 그칠 것으로 추산됐다. 카날리스는 2023년 PC 출하량이 전년보다 12.4% 쪼그라들 것으로 내다봤다. 2024년 스마트폰 출하량은 2023년보다 2.5~5%, 같은 기간 PC 출하량은 3.2~7% 늘어날 전망이지만, 기저 효과를 감안하면 완연한 수요 회복으로 보기는 힘들다.

PC와 스마트폰 수요 공백은 서버용 컴퓨터가 메운다. 서버 메모리 수요 증가 요인은 크게 2가지로, 차세대 D램 DDR5 수요 증가와 AI 기술 고도화다. DDR5는 현재 업계 표준 규격인 DDR4보다 용량은 4배, 데이터 처리 속도는 2배 빨라진 D램 반도체 규격이다. 서버 업체가 DDR4에서 DDR5로 칩을 바꾸면서 서버용 D램 시장은 DDR5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2024년 1분기 DDR5 고정 거래 가격이 10~15% 상승할 것으로 봤다.

생성형 AI 기술 고도화도 호재다. AI 프로그램을 돌리려면 막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기존 서버보다 데이터 용량을 월등히 늘려야 한다. 데이터 용량 증가는 곧 메모리 칩 수요 증가로 이어진다.

고영민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024년 2분기부터 AI 서비스 본격화를 예상하며 사용자가 늘어나고 처리해야 할 데이터 트래픽이 증가하면 기본 인프라인 서버 용량 증대가 필수”라며 “2024년 2분기부터 서버용 메모리 투자가 재개될 것”이라 기대했다.

[전제 조건 2] 고객 맞춤 칩

특화 개발 역량 좌우

AI 기술 고도화로 촉발된 HBM 시장 성장에 가속이 붙고 있다. 증권가는 D램 시장에서 HBM 비중이 2023년 9%에서 2024년 19%까지 확대될 것으로 본다. HBM 시장 규모는 2023년 15억달러에서 2025년 56억달러로 3.7배 커질 전망이다. HBM 고속 성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 속성을 바꿔놓고 있다.

첫째, HBM 칩 시장은 주문형, 수주형 산업에 가깝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지금까지 주력해온 메모리 반도체는 범용 비즈니스에 속한다. 이런 속성의 시장은 자본집약적, 중앙집중적 생산 구조가 요구된다. HBM 같은 고객 맞춤형 칩(Customized Chip)이나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등은 커스텀 비즈니스 영역에 해당한다.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과 커스텀 비즈니스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은 서로 다르다는 게 반도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산업 헤게모니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조직 자원 분산과 재배치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역량에 따라 HBM 시장 성패가 갈릴 것이라는 관측이다.

둘째, HBM 등 고객 맞춤형 칩 성장으로 우리 반도체 기업은 후공정 패키징에 사활을 건다. 반도체는 크게 웨이퍼를 제조하고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칩을 패키징하는 후공정으로 나뉜다. 범용 칩 기반 시장에서는 전공정이 중요했다. 하지만 IT 기기 맞춤형 칩 수요가 급증하면서 기존 미세화 공정으로는 기술적, 사업적 한계에 부딪혀 후공정 패키징이 화두로 떠올랐다. 패키징은 반도체 공정에서 생산된 칩을 기판과 연결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패키징은 단순히 제품을 출하하기 위한 포장 단계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Advanced Packaging’이라 불리는 첨단 패키징이 산업 판도를 바꿔놨지만 우리 반도체 기업은 이 부문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가령, ‘웨이퍼 레벨 패키징’이라고도 불리는 첨단 패키징 공법은 전통적인 패키징과 천양지차다. 기존에는 웨이퍼를 개별 반도체 칩으로 자르는 ‘다이싱(Dicing)’을 거쳐 각 칩을 패키징했다면, 웨이퍼 레벨 패키징은 회로가 그려진 거대한 웨이퍼상에서 여러 개의 칩을 한꺼번에 패키징하는 것이 특징이다. 크게, 기존 공정은 실리콘 웨이퍼 → 다이싱 → 패키징 순서라면, 웨이퍼 레벨 패키징은 웨이퍼 → 패키징 → 다이싱 순서다. 전공정에 해당하는 ‘웨이퍼 레벨’에서 패키징이 이뤄지므로, 더는 후공정이라 부르기도 힘들다.

여러 개 칩을 입체적으로 배열해 집적도를 높이는 첨단 패키징 기술은 ‘모어 댄 무어’ 시대에 더욱 각광받는다. 시장조사 업체 욜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21년 374억달러(약 48조원) 규모였던 첨단 패키징 시장은 2027년 650억달러(약 83조5000억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전제 조건 3] 3D 패키징

칩렛·이종집적 각광

패키징에서 최근 각광받는 기술은 이름도 생소한 ‘칩렛(Chiplet)’과 ‘이종(異種)집적(HI·Heterogeneous Integration)’이다. 칩렛은 독립적으로 생산한 여러 칩을 연결해 블록처럼 조립하는 기술을 말한다. 서로 다른 기능의 반도체 칩을 레고 블록처럼 연결해 고성능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레고 같은 패키지(Lego-like package)’라고도 불린다. 이종집적은 시스템과 메모리 등 서로 다른 반도체 칩을 하나의 패키지로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에는 칩렛 기술이 진화를 거듭해 ‘3D 칩렛 구조 이종집적’ 기술로 한 단계 도약했다. 이때, 시스템과 메모리 반도체를 수평으로 배열하면 2.5D 패키지, 수직으로 쌓는 적층 방식을 쓰면 3D 패키지로 분류된다.

칩렛 기술이 각광받는 이유는 결국 수율 때문이다. 생산 관리 관점에서는 대면적 칩 1개보다 여러 개의 작은 칩 생산이 수율이 높다. 가령, 반도체 생산 결함률이 50%라고 가정하자. 이때, 1개 웨이퍼에서 커다란 칩 100개를 생산하면 수율은 50%다. 반면, 웨이퍼 1개에서 작은 칩 1000개를 생산하면 수율은 95%로 상승한다. 반도체는 기술력이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특수 산업이다. 수율이 곧 제조원가라는 점에서 칩렛은 비용 관점에서 비교 불가다.

특히 3D 적층은 앞으로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을 규정하는 핵심 기술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칩을 수직으로 쌓으면 전자 이동 거리가 짧아져 전류의 이동 속도가 개선되고 이는 데이터 처리 속도 향상으로 이어진다. 3D 적층은 CMOS 이미지센서, HBM 등에 적용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 중이다. 기능별 칩을 따로 제작한 후 단일 칩에 집적하는 칩렛, 웨이퍼와 웨이퍼를 적층하는 W2W 본딩, 웨이퍼 전면과 후면을 모두 활용하는 BSPDN 등 첨단 패키징 공법에는 고도의 3D 적층 기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삼성을 비롯한 우리 반도체 기업의 패키징 기술력은 선두 주자로 평가받는 대만보다 10년가량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TSMC는 파운드리와 패키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합적으로 구축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인다. 엔비디아 같은 칩 제조사는 파운드리와 패키징 등의 전체 프로세스를 하나의 업체에 맡기고 싶어 한다. 5㎚ 이하 선단 공정 기술과 패키징 역량까지 모두 갖췄다는 점은 TSMC의 최대 강점으로 평가된다.

TSMC는 이미 2011년부터 칩렛 기술을 개발해 양산하기 시작했고 한국이 목표로 하는 2.5D 패키징을 양산 중인 단계다. 특히 TSMC는 반도체 칩을 수직으로 쌓는 3D 패키징에 ‘3D 패브릭’이라는 브랜드명을 붙여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왔다. SoIC, InFO, CoWos 등이 모두 TSMC의 ‘3D 패브릭’ 브랜드에 속한다.

SK하이닉스가 개발한 초고성능 D램 신제품 ‘HBM3E’. (SK하이닉스 제공)
[전제 조건 4] CXL 초격차

온디바이스 AI 활짝

이름도 생소한 차세대 메모리 기술 CXL(Compute Express Link·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 역시 반도체 초격차를 판가름할 핵심 승부처다. CXL은 메모리 용량을 유연하게 늘릴 수 있는 연결 기술이다. 인공지능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때 필수 기술로 각광받는다. HBM이 D램 여러 개를 쌓는 적층 방식으로 메모리 성능을 끌어올린다면, CXL은 컴퓨터 내부 시스템 전체를 연결하고 합치는 식이다. 컴퓨터 두뇌인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정보가 저장된 메모리 반도체 등 다양한 컴퓨팅 시스템이 통신하는 인터페이스를 하나로 통합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다. 이론상 서버에 필요한 D램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메모리 용량을 유연하게 늘릴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기존에는 서버를 사용하면 메모리 용량과 성능이 고정됐다. CXL 기반 메모리는 서버 여러 대가 메모리를 공유하므로 서버 구조를 손대지 않고도 메모리 용량을 손쉽게 확장할 수 있다. 가령, CPU당 16개 D램이 평균 최대치라면 CXL 기반 메모리는 용량을 최소 두 배 늘릴 수 있다. 가격 부담도 덜하다. HBM은 D램보다 7배 비싸지만 CXL을 활용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DDR5 램으로 메모리 용량을 늘릴 수 있다.

현재 CXL 기반 메모리는 인텔 CPU 4세대 일부 제품에 탑재되지만 확장 능력이 제한적인 ‘1.1 규격’을 지원해 장점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있단 평가다. 인텔은 2024년 상반기 중 확장성을 대폭 늘린 CXL 2.0 규격에 맞는 첫 CPU 5세대 ‘제온’ 프로세서를 내놓는다. 인텔 CPU가 CXL 2.0 규격을 지원하기 시작하면 CXL 시장이 본격 개화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초반 열세를 보인 삼성전자는 CXL 분야에선 단단히 벼른다. 삼성전자는 2021년 5월 세계 최초로 CXL 기반 D램 기술을 개발했다. 2023년 12월 4일에는 CXL 관련 4종 상표를 출원하는 등 상용화에 속도를 낸다. 가시적 성과도 관찰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업계 최초로 기업용 리눅스 1위 기업 레드햇과 CXL 메모리 동작 검증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CXL 기반 메모리가 컴퓨터 운영체제인 리눅스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의미다.

이외 낸드 시장은 AI 기능을 기기에 탑재하는 ‘온디바이스 AI’에 기대를 건다. 온디바이스 AI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PC, 가전, 자동차, 보안,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 중이다. 기기별 맞춤형 AI 칩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버 대신 기기 자체에 AI 모델을 싣는 온디바이스 AI 특성상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고용량·고성능 낸드가 필수적이다. 침체 일로를 걷던 낸드 수요도 회복세를 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AI 반도체는 과거 범용 제품에서 벗어나 각 개별 산업에 특화하고 제품 종류도 다변화되는 맞춤형 시장(Customized Market)으로 변화할 것”이라며 “2024년부터 생성형 AI는 온디바이스를 통해 전 산업에 빠르게 확산하는 동시에 AI 학습과 추론의 병행이 전개될 것”으로 전망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3호 (2024.01.17~2024.01.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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