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달러 강타한 '검은수요일'…주식·채권·원화값 동반 하락
되살아난 수퍼달러(달러강세)가 17일 아시아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한국은 주식ㆍ채권ㆍ원화값이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가 나타났다. 미국의 금리 인하에 대한 시장의 낙관적 기대가 옅어지고, 중동ㆍ대만 등지 지정학적 위험에 투자자의 위험자산 회피(리스크 오프) 심리가 커지면서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값은 전 거래일(달러당 1331.8원)보다 달러당 12.4원 하락한(환율은 상승) 1344.2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틀 연속 달러당 10원 넘게 하락하면서 두 달 보름여 만에 ‘1달러=1340원 선’이 깨졌다. 지난해 말(1288원)과 비교하면 원화값은 새해 들어 달러당 56.2원 수직 낙하했다
이날 채권값과 주가도 동반 하락했다. 채권시장에 따르면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0.047%포인트 오른(채권값은 하락) 연 3.369%에 장을 마감했다. 연초 이후 가장 높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연 3.277%)도 하루 사이 0.042%포인트 뛰었다.
코스피는 연초 이후 가장 큰 폭(2.47%)으로 내린 2435.9에 마감했다. 위험회피 심리에 외국인 투자자가 9023억원어치 ‘팔자’에 나선 영향이 크다. 이날 개인투자자는 정부가 쏟아낸 증시 활성화 대책에 8508억원 순매수에 나섰지만, 하락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시가총액(시총) 상위 종목도 일제히 파란불(하락)을 켰다. 시총 상위 10개 종목 가운데(우선주 제외) LG화학(-5.44%)과 셀트리온(-5.07%) 주가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아시아 증시도 먹구름을 드리웠다. 대만 자취안 지수는 1.07% 내린 1만7161.79에 거래를 마쳤다. 연일 신기록을 세웠던 일본 닛케이225지수도 0.4% 하락 마감했다. 특히 홍콩 항셍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3.71% 급락해 1만5276.9에 장을 마쳤다.
국내외 금융시장이 요동친 것은 미국의 조기 금리 인하 기대감이 잦아들면서 수퍼달러가 되살아난 영향이 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16일(현지시간) 주요 6개국 통화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1973년=100)는 103.36을 나타냈다. 달러지수가 103선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 12월 12일(103.86) 이후 한달여 만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크리스토퍼 월러 이사의 ‘매파(통화 긴축 선호적)’ 발언이 불쏘시개가 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월러 이사는 16일(현지시간) 브루킹스 연구소가 주최한 한 행사에서 “고용시장이 둔화되고, 인플레이션은 Fed 목표치인 2%에 근접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미국의 금리 조기 인상 가능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그는 “과거 (통화정책에서) 금리 인하는 종종 신속하고 큰 폭으로 이뤄졌지만, 이번엔 과거처럼 금리를 빠르게 인하할 이유는 없다”고 덧붙였다.
미국 월가 투자은행인 에버코어ISI의 크리슈나 구하 부회장은 “월러 이사의 발언은 (시장이 기대한) 3월 금리 인하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도 이날 보고서에서 “(월러 이사의 발언은) Fed가 금리 인하를 다소 늦추거나, 분기당 한차례 인하를 선호할 우려가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에 대해 월가의 신중론에 무게가 실리자, 시장은 낙담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페드워치에 따르면 Fed가 이르면 3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낮출 확률은 한국시간으로 17일 오후 3시 30분 기준은 61.4%다. 하루 사이 15.5%포인트 낮아졌다.
월러 발언에 미국 국채 금리는 들썩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16일(현지시간) 10년 만기 미국 국채금리는 전 거래일(연 3.944%)보다 0.123%포인트 오른 연 4.067%를 나타냈다. 이날 뉴욕 3대 지수는 일제히 하락 마감했다.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갈등도 안전자산인 달러 강세 오름세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홍해를 둘러싼 중동 지역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에서 민간 선박을 공격하며 무력 도발을 이어가자 미국도 이에 맞서 공습 강도를 높였다고 보도했다. 최근 총통 선거를 치른 대만도 국제 정세가 불안하다. 이번 선거에서 친미ㆍ독립 성향의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 후보가 승리하면서 중국의 경제 압박 수위가 높아질 수 있어서다.
중국의 ‘경제 성적표’가 시장의 예상보다 부진한 점도 투자심리를 위축시켰다. 17일(현지시간)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중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ㆍ5.2% 달성)은 5% 목표치 달성에 성공했지만, 부동산과 소비의 부진을 털어내진 못했다. 지난달 중국의 소매 판매는 1년 전 대비 7.4% 늘면서 시장의 예상치(8%)를 밑돌았다. 특히 지난달 중국 신규 주택가격지수가 전월 대비 0.45% 하락했다. 지난해 11월 하락 폭(0.37%)을 넘어선 수치로 중국 부동산 경기 침체가 지속할 것이란 시장의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상당수 시장 전문가는 미국 고금리 장기화와 지정학적 리스크 등 겹악재가 겹치면서 아시아 금융시장이 요동친 것으로 분석한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금리 인하 전망 후퇴와 국제 정세의 불안, 중국의 부진한 소비 등 복합적 원인으로 투자자의 위험회피 성향이 커졌다”고 말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도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가 시장의 예상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며 “당분간 미국을 넘어 아시아 금융시장까지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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