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둔 한 사람의 마지막 60여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규승 기자]
▲ 2019년 교향시 ‘여민락’ 연주 후 무대인사 (지휘 성기선, 국립심포니) |
ⓒ 이신우 |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의 마지막 60여 일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음악적 기록입니다."
지난 2008년, 제2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당시에는 '창작관현악축제'라는 타이틀로 진행됐다)에 선정된 이신우(55) 작곡가가 15년 만에 같은 무대에서 연주하는 자신의 연주곡인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 for Violin and Orchestra)'을 이렇게 소개했다.
햇수로는 13회를 건너뛰었으며, 시기상으로는 15년 만에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10여 년을 뛰어넘는 시기를 견디고, 같은 무대에 같은 듯 다른 작품을 들고 온 그에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려달라 전했다. (제2회 아창제 공연 영상 보러가기)
"'보이지 않는 손'은 레퀴엠 성격의 작품이에요. 2000년에 두 악장으로 초연했고, 2002년에 3악장으로 연주했는데, 이번 아창제를 앞두고 3악장을 대폭 개작했어요. 1~2악장은 사운드를 새로 다듬었고요. 삶을 통한 통찰과 깨달음을 전제로 하는 작품의 정신적, 영적 측면과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와 적절한 밸런스 찾기라는 기술적, 양식적 문제를 통합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레퀴엠(Requiem)'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
미사곡의 일종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위령미사)'를 할 때, 하나님께 망자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기 위한 전례 음악을 지칭하며, 다른 말로는 진혼곡이라 부르는 말이다. 공연을 소개할 때, 그가 이 단어를 제일 먼저 언급한 이유가 궁금했다.
"지난 2000년 1월,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두 달여의 짧은 투병기간 동안 목격한 영혼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첫아이를 얻었는데,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의 본질적 사건을 동시에 겪은 시기였어요."
이때부터 이씨는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커져갔고, 이런 삶의 변화가 그의 음악어법을 바뀌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고 소개했다. 이런 시기를 경험한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의 각 악장을 '자아와의 투쟁', '내려놓음', '회심', '죽음과 초월의 순간'으로 구성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1악장에는 고단했던 삶 속에 자아의 상처 입은 내면을 담았으며, 2악장에는 싸늘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어느 주일의 눈 덮인 새벽녘에 아름답게 변모한 영혼을, 마지막으로 3악장에는 마침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로 향하는 신비한 여정과 죽음을 들려준다.
▲ 2019년 ‘네 개의 탄식의 노래’ 초연 후 무대인사 (소프라노 유현아, 지휘 장윤성, 프라임필하모니) |
ⓒ 이신우 |
특히, '보이지 않는 손'은 2000년에 작곡된 그의 초기 작품으로, 이때부터 본능적으로 이런 주제에 집중했다. 평생에 걸쳐 고착되는 인간 사고의 틀, 경직된 신념체계로 인한 내적 고통, 두려움, 불안을 추적하는 1악장, 자아로부터 해방된 영혼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2악장, 죽음과 육신을 벗은 영혼의 자유와 안식을 다룬 3악장으로 이어간다. 연주에서 바이올린의 역할은 콘체르토에서 기교적 독주자라기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찰하는 관찰자로서의 예술가에 가깝게 다가선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그는 악기의 제목으로 차용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에 대한 설명도 놓치지 않았다. "바이올린은 협주곡에서의 독주 악기로서의 기능과 오케스트라를 리드하는 악기로서의 두 기능을 모두 수행한다"라며. 이 곡이 때로는 비루투오소(virtuoso, 매우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진 대가를 일컫는 말)한 모습으로, 다른 방식으로는 오케스트라 속에서 특정 정서와 색채를 이끌어내며 오케스트라와 조화를 이룬다고 말했다.
2000년 한민족창작음악축전에서 초연에 김현미와 수원시향이, 2002년에는 정호진과 원주시향이, 2008년 아창제에서는 백주영과 성남시향이 함께 한 바 있다. 2019년 백주영과 프라임필하모니 연주를 거쳐 이번 아창제에서는 한수진과 국립심포니가 호흡을 맞출 만큼 변화를 이어왔다. 이제 15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를 앞두고 평소에 작곡가로서 아창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 ‘보이지 않는 손’ 자필 악보 사진 |
ⓒ 이신우 |
이신우 작곡가는 지난 2008년, 이번 아창제의 초기 전신이었던 제2회 무대(창작관현악축제)에서 경험했던 당시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이번 '보이지 않는 손'의 2악장은 완전히 조성이자 심각하게 단순한(?) 협화음이에요. 리허설 당시, 성남시향 김봉 지휘자님의 위트 넘치는 한마디, "Eb!! 삼화음!!"이 기억에 남아요. 무조음악이 대부분이었던 불협화 속에서 "이 소리가 맞나?"라며 혼미하던 상황이었거든요(하하). 제 음악어법이 극적으로 바뀐 시기, 이십 년도 넘은 몇몇 작품들을 다시 손질해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도 그중 하나에요. 당시 날것의 영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거친 소리와 미성숙한 표현을 정제하고 다듬었어요. 무엇보다 초연 당시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어떻게 다르게 들릴지, 청중은 어떻게 느낄지 저도 궁금합니다."
이번에 협연으로 나서는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와의 인연도 들려줬다. 한씨는 '이신우의 가지 않은 길 III'(2025)에 협연으로 나서는 연주자다. 그동안 독주자들과 협주곡, 소나타나 이중주 실내악 작품을 함께 해왔는데 아창제를 통해 협주곡으로 한씨와 첫 작업을 시작했다. 이씨는 영국에서 유학했고, 한씨는 영국에서 자라서 그곳에 많은 문화적 부분들과 지인들을 공유하는 인연이 있었다. 이렇게 한씨뿐 아니라 평소 그에게 영향을 미친 작곡가와 일화에 관한 뒷 이야기도 들려줬다.
"성경을 통해 인간에 대해, 신과 인간에 대해,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노장 사상과 실존주의 철학, 신화, 고대의 역사와 종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인간 존재,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죠.
최근에는 헤세와 융의 문학과 저술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 심리, 무의식, 에고가 아니라 보다 깊은 자신, 자아에 대한 연구들. 다시 말해 외면보다 내면에 시선이 갑니다. 2020년에 타계하신 강석희 선생님은 제게 창작에 대한 열정과 날선 자극을 끊임없이 주셨던 실험가이자 스승이셨고, 백병동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는 '행위'를 넘어 '존재'로 승화된 예술가의 힘을 느낍니다.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고요히 계시며, 작곡가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대해 주셨거든요."
한편 그는 오는 9월, 수원시향이 연주할 교향시 여민락 수정과 '가지 않은 길' 올해 12월에 공연할 '달항아리를 위한 시'(비올라 이화윤), 2025년에 들려줄 '아침'(바이올린 한수진)에서 연주할 작품들을 구상하며 평소처럼 작곡과 강의 등을 병행할 예정이다. 작곡에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과 외부 활동의 적절한 밸런스를 찾아 일상을 꾸준히, 조화롭게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특별히 재직 중인 서울대 대학원 석·박사과정 작곡가들을 위한 '작곡세미나' 강의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며, 그가 2023년 12월에 시작한 음악시리즈 '가지 않은 길'로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작곡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길을 가야하는데, 저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시대와 사회, 타자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제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소리에 귀 기울였어요. 비로소 정말 제가 원하는 삶과 음악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죠. 인공지능 기술혁명과 외적 화려함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어려운 시대입니다만, 앞으로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창작 본연의 가치를 품은 진정성 있는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 제15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포스터 |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창작음악제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창작음악제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가 오는 2월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화려하게 문을 연다. 이 축제는 서양의 고전음악이 주를 이루는 한국 음악시장에서 창작곡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작곡가와 지휘, 연주자들이 부담없이 창작관현악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2007년부터 시작됐다.
이번에 선보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2000년 한민족창작음악축전 본선(바이올린 김현미, 지휘 최승한, 수원시향)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2008년에는 제2회 아창제(바이올린 백주영, 지휘 김봉, 성남시향)에서 연주됐다. 올해로 15회를 맞는 축제를 앞두고 이신우 작곡가에게 15년 만의 컴백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이 곡을 언젠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쳐서 무대에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요, 사실 오래되기도 했고 그동안 아창제에서 많은 작품들이 나와서 솔직히 이 곡이 이번 음악회에서 연주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창제는 제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생과 음악의 향을 더 깊이 우려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무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매년 국악과 양악부문의 관현악곡 작품을 공모와 심사를 통해 선정하는데, 15년 동안 총 171작품이 발굴됐다. 올해는 공모를 진행하지 않았고, 그동안 발표됐던 작품들 중 양악과 국악로별 5작품씩, 총 10작품을 연주한다. 양악에는 이씨를 비롯해 김신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혼잣말 7', 조우성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나비효과2', 이홍석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암흑의 뒤편', 조은화의 장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연, 스스로 그러하다'(협연 최소리)가 함께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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