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처럼 유한함이 연극의 매력"…40년 베테랑 연출 김아라의 '연극론'

홍지유 2024. 1. 1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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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출가 김아라(68)는 '최초'와 '최연소'의 역사를 썼다. 1991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국립극단 역사상 최초의 여성 연출가이자 최연소 연출가가 됐고, 이듬해에는 연극 연출가로서는 처음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받았다.

그가 만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은 연극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젠더프리(gender free·성별에 구애받지 않음)라는 개념이 없던 1995년에 그리스 비극을 연출하면서 남성 배우에게 여성 역을 맡긴 것도 그가 선택한 '파격'이다. 40년 연극 인생을 담은 에세이집 『충동』을 펴낸 김아라를 지난 11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아라 연출가가 지난 1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기자

Q : 실험적인 연극을 하면서도 연출가로서 인기를 누렸다.
A :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관심도 받았으니 운이 좋았다. 연극은 근본적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다. 공간과 공연 기간, 관객 수 모두 제한적이지 않나. 그렇다고 뮤지컬처럼 스타 위주로 굴러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의외로 마니아층이 있다.

Q : 주로 어떤 분들인가.
A : 젊은 층이나 공연 관계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연령대나 직업도 제각각이다.

Q : 가장 기억에 남는 관객은.
A : 1995년 강원도 영월에서 '이디푸스와의 여행'(장정일의 희곡 '긴 여행'을 틀로 삼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극중극으로 삽입한 연극)을 선보였다. 2500년 전 쓰인 그리스 비극을 바탕으로 한 실험 연극이었는데도 반응이 열렬했다. 오히려 서울 관객들보다 더 열려있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였다. 서울 관객이 '너희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분위기라면 영월 관객은 무장 해제하고 박수부터 친다. 그때 깨달았다. 색안경은 내가 끼고 있었다는 걸. 실험극은 공연 깨나 봤다는 관객에게만 통한다는 것도 착각이었다.

연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연출 김아라)의 포스터. 연극은 2시간 동안 대사 한 마디 없이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인간의 외로움을 표현한다. 사진 극단 무천

Q : 배우 신구는 '사로잡힌 영혼'(연출 김아라)을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본인의 연출은 뭐가 특별한가.
A : 배우를 사랑할 것. 가르치려 들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를 꼭 지키려고 한다. 연애할 때 상대의 장점을 크게 보면 단점은 그럭저럭 가려지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배우를 본다. 그런 방식이 몸에 익으면 배우의 새로운 면을 계속 발굴할 수 있게 된다.

배우 남명렬이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연기하는 모습. 사진 남명렬

Q : 배우 남명렬과 작업하면서 여자 역을 맡기기도 했다.
A : 1995년 연극 '이디푸스와의 여행'에서 오이디푸스의 엄마 이오카스테 역을 맡겼다. 당시 평단은 캐스팅에 회의적이었지만, 나중엔 '남명렬 이상의 이오카스테는 없다'고 하더라. 남명렬 배우도 이 작품을 하며 시야가 트였다고 했다. 배우 자신도 몰랐던 장점을 발굴할 때 정말 기뻤다.

Q : 연습실에서 지키는 원칙이 있나.
A : 자유롭게, 행복하게 연습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연습실에서 보냈다. 그 시간이 고통 뿐이라면 내 인생은 실패한 거다. 그런 생각 때문에 연습실을 놀이터처럼 만들고 싶었다.

Q : 연극의 매력은 무엇인가.
A : 인생처럼 유한하다는 것이다. 김아라가 죽으면 김아라의 연극은 볼 수 없는데, 이게 연극의 매력이다. 내 연극을 녹화한 영상을 5분 이상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잘 찍은 영상이라도 그 순간의, 그 공간의 열기를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다. 또 누군가 실수를 해도 그 부분을 편집하거나 오려낼 수 없고 그저 흘러간다는 점이 연극의 매력이다.

Q : 앞으로 어떤 연극을 하고 싶나.
A : 40년 넘게 연극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작품이 너무 많다. 최근 목록을 추렸는데 100개가 넘게 나왔다. 그나마 추리고 추린 게 10편 내외다. 현실적으로 그 정도가 마지노선 아닐까. (웃음) 당장 추진 중인 것은 '전쟁 연작'이다. 2500년 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부터 최근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까지 다룬다. '왜 인간은 끝없이 전쟁을 일으킬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2021년 김아라가 연출한 침묵극 '물의 정거장' 공연 중 한 장면. 일본의 전위 작가 오타쇼고가 쓴 침묵극 3부작 중 하나로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그렸다. 사진 극단 무천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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