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 같아요" [수산봉수 제주살이]

이봉수 2024. 1. 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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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 제주살이] 한미리스쿨 청년들의 '솔직 씨네토크'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분노하긴 했는데 영화가 끝나면 사그라져요"
   
"청년들은 실제 사건이라는 생각보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보는 거 같아요. 등장인물을 보며 중장년들은 실제 인물을 떠올리겠지만 청년들은 연결이 잘 안되니 가상 캐릭터처럼 생각하는 이도 많습니다. 전두광을 보고도 전두환에 분노하기보단 황정민에 분노해요. 황정민이 고통받는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합니다."

"영화를 보며 분노하긴 했는데 끝나면 그게 사그라져요. 청년들 앞에 놓인 현실이 더 각박하니까요. 잘 모르던 역사를 일깨워준 측면은 있지만 흥행에 비해 현실정치에서 청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크진 않을 거 같은데요."

영화 <서울의 봄>을 본 청년들과 '솔직 씨네토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들의 소감은 지금까지 언론에 소개된 거나 정치권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 많았다.

MBC저널리즘스쿨과 한미리스쿨 무료 초집중-언론인양성과정 수료생 등 8명이 올해 초 개설된 한미리스쿨 '심화-언론인양성과정'에 입소했다. 이들은 매일 아침 매체 모니터링 결과를 발제하고, 한 주에 예비언론인 권장도서 2권을 읽은 뒤 토론하고, 글 2편을 써내 첨삭받는 집중과정을 이수하고 있지만, 일요일에는 함께 제주도 답사여행을 하고, 밤에 영화를 다운받아 본 뒤 '솔직 씨네토크'를 한다.  
 
▲ 한미리스쿨 씨네토크 한미리스쿨 학생들은 영화 <서울의 봄>을 본 뒤 ‘솔직 씨네토크’를 했다.
ⓒ 이봉수
 
"윤석열 후보 지지한 청년 일부는 더 결속할 수도"

첫 영화로 선택한 '서울의 봄'은 개봉관 상영이 끝나지 않아 다운받을 수 없기에 아직 보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영화표를 선물하고 성산읍에서 한 시간 거리인 제주시내에 가서 보게 했다. 군대에 갔다 온 남학생들은 이런 얘기도 했다.

"영화에서 의로운 주인공으로 부각된 장태완 장군이나 김오랑 소령보단 정선엽 병장의 죽음이 제일 안타까웠어요. 말년 병장은 제대 앞두고 진짜 몸조심하죠. 장교들은 직업으로 군대를 선택한 거지만 우린 끌려간 건데…"

"대선 때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 상당수 청년 남성들은 영화를 보고 더 결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애국'의 방향이 다른 거죠. 내 친구도 배경음악으로 깔린 '전선을 간다'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언론인 지망생이어서 그런지 역사에 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한 학생은 역사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팩션 영화'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꿀잼이라고 해서 봤는데 영화의 재미를 더한 건 이해하지만 너무 선악 구도로 만든 건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청년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했다고들 하는데 우리도 알 만큼은 압니다."

"언론과 영화계가 한국영화 부활을 얘기하며 <노량>까지 이어가려고 하는데 안쓰러워요. 이 영화의 흥행은 그동안 얼마나 볼만한 영화가 없었는지 말해주잖아요. 유희로 영화를 소비하는 청년들에게 큰 역사 공부가 되는 건 아니죠."

"냉소나 무관심도 분노의 다른 표현"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영화 후기에도 '재미있다', '역사를 알게 해줬다'는 반응이 대종을 이루지만, 능력주의와 경쟁지상주의가 휩쓰는 세태를 반영하듯 전두환을 양면으로 바라보는 글도 눈에 띄었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 수많은 위기를 맞이하더라도 신념을 잃지 않고 강력한 리더십 아래 모두가 끈기와 집념으로 협동하면 결국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음.'

이 글에는 비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고 동조하는 댓글에 추천수가 매우 많았다. 한미리스쿨 학생들은 "청년들이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자조적인 답변을 하기도 했다.

"권력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것이라고 인식해야 빼앗길 때 분노하게 되는데... 그러면 기성세대는 제대로 분노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왜 이 모양입니까?"

"정치현실에 대한 냉소나 무관심도 분노의 다른 표현입니다. 서울의 봄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거 같아요."
 
▲ 진압군과 반란군 대치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 역 황정민과 장태완 역 정우성은 경복궁 입구에서 맞닥뜨리지만 극적 효과를 노린 연출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정치의 효능감 상실이 무관심으로 이어져
 

기성세대와는 다른 청년들의 이런 심리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청년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런 심리의 근저가 확인된다.

첫째, 정치의 효능감 상실이 정치 무관심과 냉소로 이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12.12쿠데타 주동세력은 권력을 분점한 뒤에도 알짜배기 부동산이나 거액의 금융자산을 소유하고 떵떵거리며 사는데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정치·경제·언론권력을 쥐고 있다. 보수성이 덜한 민주당 계열 정당도 세 번이나 집권했지만 취업난과 생활고 등 청년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서울의 봄'은 1980년에만 오지 않은 게 아니다. 2016년 가을 촛불혁명이 점화돼 2017년 3월 11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을 때도 '서울의 봄'은 오다 말았다. '혁명의 시대'를 겪고도 취업불안과 해고불안, 주거불안과 보육불안이 해소되지 않자, 취업·연애·결혼·출산까지 기피하는 'N포세대' 심리가 확산됐다.

"고통 주는 주범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치세력 형성해야"

그런데도 청년들은 왜 분노하지 않는가에 관해 심리학자 김태형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올 1월호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개인주의 심리나 심한 무력감에 지배당하며 살아왔고, 현재에도 고립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세상을 향해 분노하지 못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분노는 거악이나 사회가 아니라, 힘없고 약한 대상 혹은 자신에게 상처나 고통을 줬던 개별적 타인을 향한다.'

그러나 그는 "청년들이야말로 정의가 실현되기를, 세상이 바뀌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세대일 것"이라며, 그걸 성취하려면 ▲자신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있는 주범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연대와 단결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청년 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반동을 부른다

둘째,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반동을 부르고 있다. 청년들은 <서울의 봄>을 보면서 불의가 승리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것을 확인했다. 하나회 해체 뒤 군이 비토하던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민주당이 잇달아 집권했을 때 한 사단장은 "이제 군부 쿠데타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휴대전화가 많이 보급돼 비밀유지가 어려울 뿐 아니라 교통체증으로 대규모 병력동원이 힘들고 방송 장악이 쉽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쿠데타군이 전자전부대를 장악해 전자기파를 쏘면 얼마든지 먹통을 만들 수 있다. 교통체증은 서울 도심 심야 공동화현상이 진행돼 쿠데타군이 주로 기동하는 새벽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방송인들이 미리 엎드리면 방송장악도 어렵지 않다. 방송사 내부 분위기를 들어보면 과거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벌인 장기파업 같은 저항은 기대하기 힘들다.

쿠데타가 불가능하기는커녕 실제로 조현천 기무사령관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 때 친위 쿠데타 실행계획을 세운 혐의를 받았다. 그는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귀국해 재판 도중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들은 언론 장악과 국회 무력화까지 기획했다.
 
▲ 하나회 회식 하나회 회식에 참석한 정치군인들은 쿠데타 성공 후 출세가도를 달리며 부귀영화를 누린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전두환 일당을 군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하고 사면도 하지 않았더라면 쿠데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터이다.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지만 최소한 전두환만은 1심의 사형 판결이 상급심까지 유지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살려주는 대신 수십·수백 명을 죽이는 무도한 정권이 재탄생할 여지를 남겨둔다면 그게 정의이고 인도주의인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독재정권과 쿠데타가 영원히 사라진 것은 혁명으로 왕의 목을 하나씩 날려버린 덕분이다. 반성도 하지 않았는데 사면해주니 이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쿠데타를 완성한 건 수구언론

셋째, 문제는 언론이다. 12.12 직후 <조선일보>는 '계엄군 이동배치 중 초병과의 오인 충돌이 있었고 사상자도 없었다'는 국방부 거짓 발표를 그대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일본 관리의 말을 인용해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민주화 작업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았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는 "모든 것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대통령 공보수석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이던 캐서린 그레이엄은 자서전에서 "모든 기사는 역사의 초고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잘못 쓴 초고를 남김으로써 유혈이 낭자한 역사의 교훈을 덮어버렸다. '쿠데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5.18을 거쳐 신군부가 집권하기까지 <조선> <중앙> <동아> <경향> 등 기성언론은 '인간 전두환' 등 찬양기사 경쟁을 벌이며 사세를 키웠다. 쿠데타를 일으킨 건 '정치군인들'이었지만 완성한 건 언론이었고, 그들은 기득권 동맹의 한 축이 되었다.
 
▲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보도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을 보도한 1980년 8월 22일 <경향신문>. 당시 이진희 <경항신문> 사장 겸 MBC 사장은 쿠데타세력을 가장 앞장서서 미화해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 경향신문
 
수구언론이 군부에 부역한 과거를 상황논리로 변명하지 못하도록, 언론 검열을 합법화한 계엄법도 손질할 때가 됐다. 전시에도 언론이 살아있어야 전쟁의 첫번째 희생자가 진실이 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전쟁사를 보면 그리스 시대는 물론 1·2차세계대전의 승자도 민주주의 국가였다. 대중은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야 참전의 위험을 무릅쓴다.

스페인 〈엘파이스〉는 프랑코 총통 사후 창간돼 1981년 군부 쿠데타에 맞서면서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됐다. 쿠데타의 밤이 지나자 대담무쌍하게 특별판을 제작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위에 나설 것을 시민들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우리 수구신문과 방송은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쿠데타군의 '선전부대'가 될 게 뻔하다. 문재인 정권 말기에 포기한 언론개혁을 다시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대선 시기에 언론은 한국의 선거와 민주주의를 타격했다.

작은 매체와 영화인이 '역사 바로잡기 대리전'

국민의힘이 '전두광의 후예'가 아니라는 수구언론과 여당의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의 이름은 선거 때마다 바뀌었지만 인물과 정신세계는 그대로 계승했다. 아니, 최근 수구 언론의 보도에 여당이 화답하고 극우세력이 전면에 나서는 걸 보면 한국의 주류세력은 더 수구화했다고 말하는 게 옳다. 대권주자의 한 사람인 원희룡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과거 전두환에게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정치와 언론이 유착해 전두환 집권을 그렇게 찬양하고 떠받쳤으면, 자기네들이 '전두광'을 계승했다고 자랑하는 게 일관성이 있다. 진정한 역사 바로잡기는 주류 언론이 아니라 작은 매체들과 영화인이 대리전을 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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