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불륜녀에서 모성애의 상징이 된 신
[이준목 기자]
아프로디테(Aphrodite)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미(美)와 사랑의 여신'으로도 유명하다. 신화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특유의 미모를 무기 삼아 수많은 이들과 사랑을 나눴고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막장드라마급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프로디테의 불륜으로 탄생한 아이가 훗날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로마 제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전설은 아이러니하다.
1월 1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4회에서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불륜이 탄생시킨 로마제국'편을 통하여 로마제국의 건국 신화와 그 뒷이야기를 조명했다. 서양고전학자인 김헌 서울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아프로디테는 어떻게 미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집필한 '신통기'에 따르면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피가 바다에 떨어지며 피어오른 거품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아프로디테라고 한다. '아프로스(Aphros)'는 그리스어로 거품이라는 뜻이다.
영어단어 'April'은 고대 로마인들이 1년중 가장 아름다운 달로 여겼던 4월을 아프로디테의 미모에 빗댄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호메로스 찬가'에는 "그녀가 신들에게 달콤한 열망을 끌어올렸고 게다가 필멸하는 인간종족과 하늘을 나는 새들과 모든 짐승들을 사로잡았습니다"라며 아프로디테의 완벽하고 우월한 미모를 칭송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과 희노애락의 모습은 인간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는 애정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신화속 신들의 러브스토리는 오늘날 현대의 막장드라마도 울고갈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올림포스 12신의 하나가 된 아프로디테는 여러 남신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으나, 정작 추남으로 유명하던 '대장장이와 불꽃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는 헤파이스토스가 어릴 적 못생겼다는 이유로 자신을 바다에 버렸던 어머니 헤라에게 복수하면서 용서를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올림포스신으로 복귀와 함께 아프로디테와의 결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헤라는 이를 수락했고 아프로디테로서는 졸지에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아내가 된 아프로디테를 위하여 기념선물로 누구든 유혹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마법의 벨트'를 만들어줬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훗날 이어질 아프로디테의 화려한 불륜행각에 날개를 달아주는 치명적인 자충수가 됐다.
결혼 후 헤파이스토스는 늘 바쁘게 일하느라 가정에 소홀했고, 아프로디테는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한 아프로디테에게 접근한 것은 헤파이스토스의 동생이자 '전쟁의 신' 아레스였다. 아프로디테는 남편과 달리 훌륭한 외모를 지닌 시동생에게 반했고, 남편이 선물한 마법의 벨트를 활용하여 아레스를 사로잡았다.
이를 눈치챈 헤파이스토스는 분노하며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두 남녀의 불륜행각을 폭로했다. 하지만 신들은 오히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더 잘 어울린다며 두 신을 정식커플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아프로디테는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정을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결별을 선언했다. 결국 결혼에 성공한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는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큐피드의 화살'로도 유명한 '사랑의 신' 에로스다.
하지만 이후로도 아프로디테의 바람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의 이복동생인 '전령의 신' 헤르메스, '바다의 신'포세이돈 등 여러 신들과 불륜행각을 이어갔고 많은 자식을 낳았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무기로 남신들을 유혹하며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해 나갔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잔혹한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호불호가 분명했던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삶에 종종 개입하여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아낌없는 은총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가혹한 보복을 내렸다.
키프로스의 조각가 퓌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성들에게 환멸을 느껴 자신의 이상형을 직접 조각하다가 급기야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살아있는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으로 만들었고 '갈리테이아'라는 이름을 얻어 퓌그말리온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유래한 용어가 인간의 믿음과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하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다.
반면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숭배하지 않은 키프로스의 여성들에게는 그릇된 욕망을 주입하여 전원을 매춘부로 만드는 것으로 잔인하게 보복했다. 또한 퓌그말리온의 증손녀 뮈르라의 다름다움을 질투하여 그녀에게 아버지를 사랑하게 만들어 근친의 관계를 맺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자식을 잉태하게 된 뮈르라는 신에게 죄값을 청하며 물약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아프로디테의 남성 편력은 신과 인간을 가리지 않았다. 아프로디테는 인간이자 트로이아의 왕족이던 앙키세스와 신분을 속이고 사랑에 빠졌고, 그와의 사이에서 반인반신의 영웅 아이네아스를 낳게 된다. 아프로디테는 "이 아이는 장차 트로이아를 지배하고 그의 후손들은 거대한 나라를 세우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이네아스는 훗날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아프로디테는 아들 아이네아스와 트로이아의 편에 섰고, 시어머니 헤라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그리스 연합군 편에 섰다. 아이네아스는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보호로 여러 번 고비를 넘기고 전장에서 용맹을 발휘했다.
트로이아가 끝내 패망한 후, 아이네아스는 살아남은 유민들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그가 이뤄낸 '제2의 트로이아'는 바로 오늘날 유럽 문명의 기초를 닦은 고대 최대의 제국으로 꼽히는 로마 제국의 역사로 이어진다.
아이네아스는 어떻게 뜬금없이 전혀 연관도 없던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되었을까. 그 시작은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AVGVSTVS, 기원전 63년-기원후 14년)에게서 비롯됐다.
본래 로마의 건국신화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이웃인 그리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뭔가 초라한 로마의 건국 신화를 대체하고 자신의 즉위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로물루스 신화보다 더 앞선 '새로운 서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그리스보다 더 풍요로운 경제와 탄탄한 국가체계를 갖춘 트로이아를 로마의 롤모델로 삼았고, 아이네아스를 건국 신화의 주인공으로 낙점했다. 아이네아스의 아들인 이울루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잡안인 율리우스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가설도 전해진다.
그리고 이는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오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명분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아프로디테와 제우스라는'신들의 혈통'까지 이어받은 신격화된 존재로 부각시키려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의도가 숨어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당대의 문학가인 베르길리우스를 섭외하여 아예 새로운 로마 역사와 건국신화를 다룬 '대체 역사'를 창조하는 작업에까지 돌입한다. 베르길리우스는〈아이네아스〉를 집필하여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아 멸망직후, 유민들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로마를 건국하기까지(기원전 약 1200여년-기원후 753년)의 모험담을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새롭게 창조해냈다.
<아이네아스>에 따르면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아의 선조들이 본래 태어난 곳이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묘사되어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가 건국되어야만 했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이다. 아이네아스의 함대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지만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고비를 벗어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도 많이 바뀌었다. 기존의 신화에서는 최악의 불륜녀에 이기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에 가까웠다면, 새로운 로마 건국 신화에서는 주인공인 아이네아스의 어머니이자 최대의 조력자 포지션을 맞게 되면서 '선량하고 모성애 넘치는 여신'으로 이미지가 180도 환골탈태했다.
모험을 거듭하던 아이네아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황금가지'를 찾아내 저승을 방문하여 아버지 양키세스를 만나게 되었다. 동시에 로물루스와 레무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훗날 로마를 건국하게 될 자신의 미래 후손들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아이네아스의 저승 방문 장면이 대서사시의 클라이맥스가 되어야했던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등극이 이미 1200여년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처음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복선의 산물인 것이다.
아이네아스는 8년에 걸친 모험 끝에 마침내 로마 건국의 터전이 되는 라티움에 상륙한다. 마지막 고비는 루툴리 족의 왕 투르누스와의 전쟁이었다. 이번에도 위기에 놓인 아이네아스를 살린 것은 '엄마 찬스'였다. 아프로디테는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아들을 위하여 옛 남편인 헤파이스토스에게 무기제작을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아이네아스는 헤파이스토스가 제작한 무구들을 갖추고 전쟁에 나아가 결국 투르누스를 물리친다.
여기서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를 굴복시키는 장면은, 트로이아 전쟁 당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물리치던 장면과 구도가 판에 박은듯 흡사하다. 새로운 헥토르가 된 아이네아스가 아킬레우스를 연상시키는 투르누스를 제압하며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모습은, 곧 아이네아스가 염원하던 제 2의 트로이아(훗날의 로마제국) 건설이라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네아스는 라티움의 국왕 라비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로마인과 트로이아인이 공생하는 라비니움을 건설하고 두 민족의 결합으로 아이네아스는 라틴족의 통합을 상징하는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아이네아스는 사후에도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신으로 부활했고, 라비니움 사람들은 아이네아스를 제우스 신과 동등하게 여기고 섬겼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네아스>에서는 라비니움 건설을 질투한 여신 헤라가 새로운 나라에서는 트로이아의 흔적을 지워줄 것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왜 베르길리우스는 굳이 이런 불필요해보이는 내용까지 넣었던 것일까.
실제 역사에서 로마와 트로이아는 엄연히 별개의 민족과 나라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실제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로마와 트로이아의 역사적 연결고리가 단절된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신화를 끌어들여서 '헤라 때문에 로마의 선조가 트로이아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설정을 덧붙인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기획하고 베르길리우스에 의하여 완성된 <아이네아스>를 통하여 로마는 기존의 로물루스 신화보다 더 길고 웅장한 건국 신화를 얻게 됐다. 또한 이는 훗날까지 로마 제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아이네아스를 통하여 대제국을 통치해야하는 로마 황제로서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참고 견뎌라, 다가올 미래를 위하여 그대들을 지켜라.' 신화 <아이네아스>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신화(神話 / Myth)란 단지 허구의 판타지나 흘러간 과거의 전설만이 아니라, 그 시대 인간의 꿈과 욕망, 사회가 나아가야할 비전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필요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화는, 훗날 새로 그려나가야 할 현실의 길잡이로서 여전히 그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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