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기 물도 고통스러웠던 시간... "진짜 애도 가능하려면"

변정윤 2024. 1. 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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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년의 사람들 ⑭] 동생 잃은 누나, 박보나씨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변정윤]

 형제자매 독일기행-4.16세월호참사 알리기 피켓팅
ⓒ 박보나
 
경기 안산 고잔역 인근에 공간 '라온숨'이 있다.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형제자매를 위해 지난 2020년 안산온마음센터에서 만든 곳이다. 단원고 학생이었던 동생을 잃은 누나 박보나씨를 지난해 10월 '라온숨'에서 만났다. 박보나씨와의 첫 만남은 그의 어머니가 급히 병원에 입원하면서 미루어졌다가 보름 뒤 이뤄졌다. 먼저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는 참사 후 2018년까지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중간에 단식했는데 그때부터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셨어요. 그래서 좀 쉴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예 외출도 안 하시다가 한 3년 정도 시골에 내려가 계셨어요."

어머니는 참사 이후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 건강했던 어머니는 활동 과정에서 단식 후 건강이 나빠지면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귀농했으나 수시로 병원에 가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3년 만에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다.

안산을 떠난 사람들

박보나씨의 첫째 동생은 독립해서 따로 생활하고 있다. 성인이 되면 독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상처를 가득 안은 채 안산을 떠났다.

"동생이 성당에서 알고 지내던 분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안산 자체도 힘들어 싫고 분리가 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상담도 오래 받았는데요. 안산을 벗어나고 싶다고 이사 가서 지내다가 최근에 엄마 보러 집에 왔었어요. 여전히 안산이 많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답답하기도 하고."

박보나씨의 집안은 친가 쪽으로는 3대째, 외가 쪽으로는 5대째 가톨릭 신앙생활을 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은 성당에 다녔고 동생들과 함께 성당 활동도 많이 했다. 하지만 박보나씨는 지금 성당에 잘 가지 않는다.

"참사도 크게 영향을 미쳤어요. 과연 신이 있나? 신을 원망하면서도 기도도 하고 그랬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종교가 그렇게 정의롭고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정의로운 종교인도 많은데 좀 따로 보게 됐던 것 같아요."

버팀목
 
 세월호참사 희생자의 형제자매 사진전
ⓒ 박보나
 
'라온숨' 이전에 형제자매들의 공간인 '우리함께'가 있었다. 안산시복지관네트워크에서 2014년부터 운영하다가 2018년 문을 닫았다. '우리함께'는 문을 닫기 전까지 단원고 학생들부터 형제자매까지 누구라도 와서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울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위로받으며 어디에도 꺼내놓을 수 없었던 마음을 드러내고 달랬다. 같은 아픔을 가졌지만 부모들과 공유하거나 나눌 수 없는 것들을 여기서 나눴다. 나누지 못하는 것들은 그것대로 존중받았다.

"공간이 분리돼 있으니까 힘들 때 와서 쉬기도 하고, 형제자매가 아닌 친구를 데리고 와서 얘기도 나눴어요. 형제자매들에게 괜찮은지 안부를 묻고 걱정해 주는 게 큰 위로였어요. 여행 갈 때는 바다를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숲으로 갔어요. 조용한 숲은 또 다른 위로가 됐어요. 프로그램들 덕분에 여행하면서 형제자매들끼리 많이 친밀해졌어요."

'우리함께'에서 형제자매들은 함께 여행을 가고 천연화장품을 만들고 캘리그라피와 드럼을 배웠다. 사진 모임과 전시 관람, 연극과 콘서트에 초대되어 가기도 했다. 세월호라는 단어를 꺼내고 얘기하는 것이 힘든 시기,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형제자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럴 때마다 형제자매들은 더 모였다. '우리함께'는 문을 닫기 전까지 형제자매들과 세월호를 지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우리함께'에서 만큼은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형제자매들은 진도와 체육관에서 느닷없이 피해자들을 찍어 대던 수많은 카메라와 번쩍이며 터지던 플래시를 기억한다. 피해자들의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자극적인 이미지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끊임없이 보도하는 언론의 민낯까지도. 피해자들은 대상화되어 자신이 찍히는 것과 카메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자신이 피사체를 찍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의 도움으로 사진 공부를 하고 모임도 했다.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함께 배우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사진 모임은 2년 뒤 사진전으로 이어졌다.

"사진 찍고 찍히는 게 왜 힘들었는지 마주하면서 조금은 극복이 됐어요. 사진전을 통해서 '피해자답다'는 것과 관련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여행사진이나 일상을 찍기도 하고, 동생 봉안함을 주기별로 꾸며서 사진에 담는 형제자매도 있었어요. 카메라는 현장이나 그 순간을 포착하는 건데 그걸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그리운 순간을 담아서 얘기할 수 있었던 것도 저희에게 좀 다른 경험이었고요."

형제자매들이 공통으로 겪는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다. 박보나씨도 세월호참사 당시 몸에 물이 닿는 것이 슬펐고 미안해서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없었다. 이불을 덮는 것도 미안하고 모든 것이 미안해서 보일러도 켜지 않았다. 바다와 배를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도 고통스럽다.

"이태원 참사도 똑같았다"
 
 박보나씨가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
ⓒ 박보나
 
박보나씨의 가족은 매년 바다로 여행을 다녔다. 지금은 바다를 바라보고 그 앞에 서는 것이 두렵다. 형제자매 중에는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거나, 외국에 나가서 배를 타기도 하고 잠수사 자격증을 딴 이들도 있다. 그들은 참사 당시 느꼈던 고통과 아물지 않는 상처 속으로 들어가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을 선택했다.

박보나씨는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치료를 요청했다.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관련 장애 치료에 사용되는 심리치료 기술의 한 형태다. 외상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처리해 정서적 고통을 완화하고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상담을 받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는데 이태원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 이후로 증상이 다시 나타나고 반복되니까 힘들었어요. 집중력도 떨어지고 물속에 잠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오송 지하차도는 물과 관련된 사건이라 그런 감각들이 느껴졌어요. 바다 이미지를 계속 보기도 어려워요. 트라우마는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요. 트라우마와 같이 잘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무지는 사실을 왜곡하면서 혐오와 차별을 낳고 결국 편견으로 굳어진다. 참사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생존자를 향해 비난과 혐오의 말들을 내뱉는다. 언론은 사고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고,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SNS를 통해 근거 없는 주장들을 쉴 새 없이 쏟아 낸다. 결국 치유 받아야 할 피해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더 깊은 고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참사 직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정치인들의) 의전이 먼저였잖아요. 그 와중에 가짜 뉴스도 많았고요. 화도 나고 답답했어요. '왜 배 타고 수학여행 갔냐?', '놀러 가다 그런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태원참사 때도 똑같더라고요. '왜 거기 갔느냐' 하는 말들이 있었어요. 이태원참사 피해자들을 국가 돈으로 지원해 주지 말라고 누가 국민청원을 올리는 걸 보고 되게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돈에 대해서 듣는 거나 이런 건 좀 힘들더라고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 아픔을 함께 짊어져 준 친구들, 동병상련의 형제자매들로 박보나씨의 인간관계가 재구성됐다. 타인의 고통보다 보상금 액수를 더 궁금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참사를 바라보는 기준이 피해 당사자와 친척들 간 같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삶이 완전히 주변부로 밀려난 것 같아요. 그전에는 편입하고 취업하고 돈도 벌고...  제가 첫째니까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지금은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게 잘사는 삶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지금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많이 공허해지고 힘들기도 해요."

진짜 애도 가능하려면...
 
 박보나씨가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
ⓒ 박보나
 
지난 2016년 세월호참사 희생자의 형제자매 2명과 천주교 신도 청년 4명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순례길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이들은 대전 어느 성당의 청년 신도들이었다. 성당 자체적으로 세월호 추모제를 준비하면서 형제자매들과 인연을 맺었다. 청년 신도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추모곡 녹음에 형제자매들이 참여해 영상 인터뷰를 하고, 성당 추모제에 참여해 발언도 했다.

"세월호 희생자를 생각하며 걸었다면서 순례길 중간중간 십자가를 두고 찍은 사진을 갖다준 분이 있었어요. 배가 물에 빠진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서 세월호를 기억해 달라고 스페인어랑 한국어로 해 놓으신 분도 있었고요. 리본을 순례길 가는 길목에 달아 놓던 분, 가방에 리본을 달고 있는 한국인분들도 만났어요. 외국인인데도 안타까워하고 몰라도 읽어 보겠다며 따듯하게 해 주는 분들 또한 많았어요. 기억에 많이 남아요."

800km를 걸어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하기까지 몸은 힘들었지만 낯선 사람들과의 길 위에서 나눈 따뜻한 온기는 잊을 수 없다. 세월호참사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의 인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꿋꿋하게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순례길이 끝나면 성당에서 향을 피우는 게 전통처럼 돼 있어요. 저희가 왔다고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해 주셨어요. 파리 총기 난사 피해자 가족분들도 함께 추모 미사 하고요. 산티아고 시장님도 만나고, 주교님이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도 얘기해줬어요. 떼제 미사에도 봉헌해 주며 청년들이랑 같이 얘기도 하고. 고통 자체만으로도 되게 슬픈 일이라며 안타깝다고 위로해 주는 모습들이 큰 힘이 됐어요."

박보나씨는 언제가 되더라도 세월호참사의 진실은 꼭 밝혀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열심히 활동하고 추모공간을 비롯한 나름의 성과를 냈지만 어느 것도 흔쾌하지 않다. 정부는 세월호참사를 진정성 있게 다루지 않았고 생명안전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았다.

"진실이 규명되어야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때 서야 진짜 애도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활동의 방식이 좀 달라지더라도 세월호 이야기를 간간이 할 거예요.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알게 돼 그걸 잘 전하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하지는 못하겠지만요."

그는 세월호와 코로나를 경험하며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와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인간과 사회를 파괴했는지, 여러 참사들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박보나씨는 동생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다. 동생이 느꼈을 고통의 크기와 자신의 힘든 상황을 비교하며 다시 일어선다. 그것이 그를 지탱해 주는 활동의 원동력이다. 느닷없이 밀려오는 상실감과 외로움으로 힘들다가도 타인의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만나면, 혼자라는 외로움과 고통은 상쇄되고 참사를 기억하는 내 편이 있다는 든든함을 느낀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생명안전사회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체를 잃게 될 것이다. 기적을 만들어 낼 공감과 연대의 힘은 우리 안에 응축되어 있다. 박보나씨가 말하는 '우리'와 '함께'의 의미를 통해 공동체의 역할을 되새겨 본다.

"안전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불안감도 더 커지는 것 같아요. 혼자서는 바꿀 수 없는 문제잖아요. 저도 무력감이 들 때면 좀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사람들도 같이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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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밀양을 살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 <얼굴들>, <숨을 참다>의 공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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