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전 소설에 한국 언론의 현재가 담겨있다니

김성호 2024. 1. 1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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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14] 하인리히 뵐 지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김성호 기자]

*기사 본문에는 작품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언론이 타락했다고 말이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더 자극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한다고들 말한다. 권력의 감시견이길 포기하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반복해 되풀이하는 모습을 우리는 심심찮게 마주한다. 그뿐인가. 없는 일을 있다 하고, 있는 일을 없다 하며, 심지어 반대되는 사실이 확인된 후에도 이를 충실히 바로잡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어느 한 기자와 언론사의 문제라 할 수 없을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언론의 실패와 마주한 사람들은 언론을 '기레기', '기더기'라는 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토록 황폐한 언론환경에 대한 분노가 오로지 한국에만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무려 반세기 전, 1975년 독일에서 쓰인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또한 언론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를 그렸으니 말이다.

소설은 더없이 차가운 문장으로 그 서장을 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에서 흔히 마주하는 것처럼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라는 글귀로 첫 장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의 거리를 두어 혹여 있을지 모를 소송 위험을 피하려는 근래 창작물들의 주의 문구와는 정 반대의 효과를 의도한 문장이다. 실제 존재하는 언론을 굳이 실명으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철저히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선전포고와도 같이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책 표지
ⓒ 민음사
 
27살 성실한 여성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소설은 27살 여성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그녀가 제 명예를 잃어버리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녀가 한 일간지 기자를 살해한 뒤 겪는 며칠 동안의 이야기가 기본적 얼개로, 독자는 이를 따르며 언론이 어떻게 그녀의 명예를 앗아가는가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중요한 건 그녀가 저지른 살인이 그녀의 명예를 앗아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카타리나는 명예를 빼앗긴다. 빼앗아간 대상은 바로 언론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한 번 이혼한 이력이 있는 매력적인 여자다. 그녀는 일찍 한 번 결혼하였는데, 남편에게 애정이 없음에도 그가 끊이지 않고 추근거린다는 이유로 이혼하였다. 이후엔 가정부 일을 배워서 몇 년 째 성실히 살아가는 중이다. 제가 돌보는 집을 몇 번쯤 바꾼 끝에 블로르나와 투르데 부부의 집을 돌보게 되었는데, 이들은 카타리나를 마치 가족처럼 세심히 챙겨준다. 무능력했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투병 중이며, 오빠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리하여 그리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가정사를 가진 카타리나에게 이들 부부는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이 없다.

소설은 카타리나의 체포로부터 시작된다. 죄명은 살인으로, 그녀는 <차이퉁> 지의 퇴트게스라는 기자를 죽인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사건 이후 자수했다는 점인데, 그녀는 퇴트게스를 죽인 뒤 죄책감이 들까 싶어 한참을 길을 따라 걸었으나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소설은 카타리나가 어째서 퇴트게스를 죽였는가를 차분히 풀어간다. 그녀는 며칠 전 한 파티 자리에서 괴텐이라는 사내와 처음 만난다. 둘은 급속히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파티장에서 나와 카타리나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언론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방법

문제는 괴텐이 은행강도와 살인 혐의를 받는 범죄자로, 도주 중이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괴텐을 감시하고 있었고 카타리나가 그와 만난 날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경찰은 카타리나의 집을 덮치는데 그는 이미 빠져나간 뒤다. 카타리나가 괴텐을 빼돌린 것으로 의심한 경찰은 카타리나를 체포하여 심문을 이어간다.

중요한 지점은 여기부터다. 언론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며 관심이 폭증하자 언론의 보도는 정도를 넘기에 이른다. 온갖 추측성 보도가 이어지고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카타리나의 가정사까지 낱낱이 까발려지기에 이른다. 수많은 언론 중에서도 <차이퉁> 지의 보도가 특히 심하다.

<차이퉁>은 사건이 화제가 된 뒤, 카타리나를 돌보기 위해 휴가를 취소한 고용주 블로르나와 투르데 부부에 대한 보도까지 이어간다. 안주인인 투르데를 '빨갱이'로 매도하기까지 하여 이들 부부를, 무엇보다 천성적으로 꼿꼿한 성품의 카타리나를 분노케 한다. 뿐만 아니다. 기자 퇴트게스는 몸이 좋지 않은 카타리나의 어머니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청소부로 위장까지 하고 잠입취재를 이어간다.

그로 인해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비극적 결말까지 맞게 되지만 이들의 취재는 그치지 않는다. 언론은 나아가 카타리나의 죽은 아버지의 행적을 다루고 전 남편의 인터뷰까지 보도한다. 이쯤되면 이 언론 보도가 괴텐을 검거하기 위한 것인지, 카타리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것인지가 헷갈릴 정도다.

불행히도 보도가 자극적일수록 사람들은 사건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그리하여 카타리나는 어느 순간 괴텐의 공범처럼 여겨지기에 이른다. 경찰의 수사내용과는 전혀 다른 일이지만, 카타리나에게 온갖 비난의 시선이 쏟아지는 걸 이미 막을 수는 없다.

살인만큼 끔찍한 무분별한 보도 

카타리나가 퇴트게스를 살해하는 건 인터뷰 자리에서다. 꽁무니를 잡힌 괴텐이 결국 검거되어 카타리나가 방면되자 퇴트게스가 카타리나에게 인터뷰를 청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인터뷰를 수락한 바로 그날 카타리나는 퇴트게스를 살해한다. 퇴트게스가 카타리나에게 성적인 언동을 했고,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데다 이런 태도를 견디지 못하는 성품인 그녀가 퇴트게스에게 총을 난사한 것이다.

카타리나의 구속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은 마침내 그녀가 형벌을 받으며 이야기를 마친다. 그러나 소설의 주된 관심은 죗값을 치르는 카타리나보다는 그녀가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있는데, 이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정작 참아낼 수 없는 것은 카타리나의 살인행위 그 자체보다도 <차이퉁>을 위시한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행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검증되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보도하고 주변인들까지 괴롭히며 취재대상자의 삶 전체를 해치는 언론이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 작가 하인리히 뵐의 주된 관심이 아닌가 한다. <차이퉁>은 카타리나가 괴텐과 그저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시대사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둥, 그리하여 당연히 언론과 대중이 주목해 마땅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둥 하고 이야기한다.

윤리를 내팽개친 언론 일깨우는 소설

그러나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대행하는 역할 만큼이나 윤리적인 방법으로 취재와 보도해야 하는 사명을 갖는다. 알권리를 위하여 다른 누구의 인권이 침해될 수 있기에 취재와 보도에 있어 윤리적인 고민을 거듭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실상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건 카타리나 블룸이 잃어버린 것, 즉 명예가 오늘날엔 이미 너무나 쉽게 훼손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언론은 <차이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와 양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회복되지 않는 피해들이 쌓여 오늘의 언론에게 기레기며 기더기라는 별칭까지 붙이기에 이른 것이다.

참담한 언론의 모습이야 잠시만 찾아봐도 그 사례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수많은 목소리를 듣다보면 사실이 전혀 아닌 내용이 사실처럼 둔갑하고 그 보도로부터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경우를 무척 흔하게 마주할 수 있다. 수많은 카타리나의 외로운 절망 뒤에 우리는 마침내 모두가 명예를 내어놓고 사는 세상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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