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 좋았던 '마블 스포트라이트' 시작, 예상 못한 부작용
[원종빈 기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촉토 부족 보호구역 마을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청각 장애인 '마야 로페즈/에코'(알라콰 콕스). 하지만 그녀는 쇼핑을 가던 중 교통사고에 휘말리고, 다리 한쪽과 엄마를 잃는다. 이에 마야의 외할머니 '출라'(탄투 카디널)는 갱단에서 일하던 마야 아빠 '윌리엄'(잔 매클라넌)을 비난하고, 윌리엄은 마야를 데리고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마야.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빠를 따라간 체육관에서 '킹핀'(빈센트 도노프리오)을 만난다. 마야는 자기를 아껴주는 킹핀을 삼촌처럼 따르고, 아빠가 살해당하자 킹핀의 권유로 그의 갱단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크아이'(제레미 레너)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기 과거에 얽힌 진실을 깨닫고, 항상 배후에 있었던 킹핀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 디즈니+ <에코> 관련 이미지. |
ⓒ 디즈니플러스 |
디즈니+ 드라마 <에코>의 공개를 앞두고 마블 스튜디오는 새로운 레이블 '마블 스포트라이트(Marvel Spotlight)'를 론칭한다고 발표했다. 스트리밍 부문 사장 브래드 윈더바움은 '마블 스포트라이트'를 "사전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 다양한 스토리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있는 레이블"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MCU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변화로 보인다. 최근 MCU는 초창기와는 달리 세계관 연계에 집중한 나머지 캐릭터 각각의 매력을 부각하는 데 실패했다. <더 마블스>만 해도 캡틴 마블, 모니카 램보, 미즈 마블의 개별 서사와 팀의 결성 과정 모두 미흡하다는 평을 받았다.
즉,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출범은 초심을 찾는 시도다. 한 캐릭터에 오롯이 집중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기존 드라마와 달리 <에코>의 에피소드 5편을 동시에 공개한 이유라 할 수도 있다. 다만 <에코>가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시작을 제대로 알렸는지는 의문이다. <에코>는 팬들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이질적인 드라마이기 때문. 그 중심에는 드라마의 지향점과 어긋난 마케팅 전략이 있다.
에코가 적임자인 이유
물론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정체성을 보여줄 1번 타자로서 에코는 부족함이 없다. <호크아이>에서 모습을 비췄지만, 비중 있는 조연에 불과했기에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차별화된 개성도 명확하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면서도 호크아이나 킹핀에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니까.
또 그녀는 나날이 거대해지는 멀티버스 사가의 세계관에서 자칫 가려지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에코는 MCU 세계관을 풍부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에 들어맞는다. 지구에서 현실적인 스케일로 활약하는 소소한 히어로들의 활약을 최근 MCU에서는 보기 어렵기 때문.
이에 더해 기존 팬들의 관심을 끌 포인트도 있었다. 그녀가 비록 중심 캐릭터는 아닐지언정, 여러 주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 <호크아이>에서 에코와 접점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 킹핀이 현재 제작 중인 디즈니+ 드라마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 출연 예정이듯이.
착실한 '에코'소개서
<에코>는 목표에 걸맞은 이야기를 착실하게 채워 넣었다. 우선 에코의 특징을 잘 살렸다. 그녀는 다양성 코드를 살리기에 가장 적합한 캐릭터다. 여성이고, 청각장애인이며, 아메리카 원주민이기 때문. 아직도 백인 남성으로 가득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 파격적인 캐릭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는 대사 연출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에코는 모든 대사를 수어로 처리하고, 상대역도 대사를 말할 때 수어를 같이 사용한다. 덕분에 <에코>의 감상 경험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잠깐만 눈을 화면에서 떼도 내용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이는 호불호가 나뉘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각 장애인의 일상 속 불편함을 주류 미디어에 메타적으로 반영한 대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촉토 부족의 일원으로 에코를 설정한 점도 눈에 띈다. 특히 촉토 부족이 지하에서 태어나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전설을 에코라는 히어로의 정체성과 연결시킨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덕분에 <호크아이> 속 조연은 차별화된 서사를 만들 수 있다. 어릴 적 촉토 부족 마을을 떠난 킹핀의 후견 하에서 지낸 에코. 킹핀의 악행과 음모를 깨달은 그녀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킹핀의 파트너가 될지, 아니면 자기 부족에게 돌아갈지.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문제점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 젊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대도시로 떠나다 보니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인프라도 부족해지면서 원주민 마을과 보호구역이 슬럼화되기 때문.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지, 아니면 주류 사회에 동화될지 선택해야 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뇌가 <에코>에 담겨 있는 셈이다. 출연진 다수를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캐스팅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감독을 고용한 제작진의 노력이 빛을 발한다.
▲ 디즈니+ <에코> 관련 이미지. |
ⓒ 디즈니플러스 |
그뿐만이 아니다. <에코>는 MCU 드라마 최초로 TV-MA(19세 관람가) 등급을 받을 정도로 액션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인지 <에코>는 디즈니+에서 공개된 MCU 드라마가 공유한 단점도 피했다. MCU 드라마는 그간 액션 연출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스토리 전개, 캐릭터 구축 면에서 호평받은 <완다비전>, <로키>, <문나이트>, <호크아이> 등도 이 지적을 못 피했다.
<에코>는 다르다. 과장 보태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연상시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액션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장에서 갱들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총에 맞아 피가 튀기는 장면을 굳이 가리지 않으며 생생함과 잔인함을 살렸다. 다른 육박전이나 기차 액션 시퀀스에서도 합을 맞추기보다는 보다 날 것의 액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성공했다.
특색도 있다. 귀가 안 들리는 캐릭터의 특성을 액션 연출에 반영했다. 드라마는 액션신이 펼쳐지기 직전에 배경 음악을 일부러 제거한다. 음향도 가능한 작게 볼륨을 낮춘다. 마치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러다가 액션신이 시작되는 순간 비명소리, 타격음 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배경 음악을 일제히 터뜨린다. 마지막 화에 등장하는 클라이맥스가 대표적이다.
이는 짧은 찰나에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켜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탁월하다. 액션은 일종의 폭발이다. 지속적으로 커지던 감정골의 불씨가 특정 계기로 불타오르는 순간, 감정은 액션으로 표출된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이듯, 액션은 스토리와 감정의 연장선이다. <에코>는 그 순간에 한 템포를 쉬어가면서 폭발의 임팩트를 최대한 누리려 한다.
포장지를 잘못 쌌다
하지만 <에코>의 특색 있는 지향점과 준수한 완성도는 정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워 보인다. 마케팅을 통해 만들어진 드라마의 이미지와 본편 내용 사이의 간극이 크기 때문. 캐릭터의 독립적인 서사에 집중한다는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취지가 무색하게 포스터와 예고편은 다른 작품과의 연계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그 결과 예상을 많이 벗어난 본편 내용과 퀄리티는 당혹감과 실망감을 키운다.
포스터만 봐도 그렇다. 에코보다도 악역인 킹핀의 모습이 더 크다. 예고편에서는 데어데블이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현재 제작 중인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 킹핀이 메인 빌런으로 등장할 예정이라는 점, 데어데블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변호사 쉬헐크>에 이미 출연한 점 등을 고려하면 <에코>를 일종의 중간다리로 간주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본편에서는 MCU 작품과의 연계성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새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호크아이> 속 에코의 분량을 일부 가져온 게 전부다. 마지막 보너스 영상 정도를 제외하면 킹핀도 본인만의 서사를 많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에코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활용된다. 예고편에서 모습을 비춘 데어데블은 말 그대로 카메오다. 즉, <에코>는 예고편이나 포스터를 보고 기대한 이야기와는 분명 다르다.
이는 예상 못한 부작용을 유발한다. 제작진의 노력, 중요도, 의의와는 별개로 촉토 부족 관련 플롯은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지 못한다. 에코가 촉토 부족이라는 사실이 <호크아이>에서 드러난 바 없다. 코믹스 팬이 아닌 이상에야 촉토 부족의 등장이 급작스러운 이유다. 결국 촉토 부족 분량에 비해 에코보다 친숙한 킹핀이 등장한 대목이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에코>는 기대에 따라 만족도가 극과 극으로 나뉠 작품이다. 앞으로의 스토리나 캐릭터와 관련된 암시나 힌트 같은 MCU와의 연계성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반면에 드라마와 영화가 긴밀히 연계되는 현재 MCU에 지쳤다면 오히려 흥미로울 수 있다. 주인공 한 명의 매력에 집중하고, 다른 작품과의 연계는 쿠키 영상에 맡긴 초창기 MCU로 돌아가려는 마블 스포트라이트의 의지가 만족스러울 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에코>가 점점 식어가는 MCU 팬들의 애정을 전부 되살릴 만한 드라마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로 마블 스포트라이트와 MCU의 미래는 아직, 그리고 여전히 불확실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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