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농성 첫 주자 여성노동자 강주룡

김삼웅 2024. 1. 1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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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62] 강주룡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지금도 가끔 고공농성이 이루어진다. 노동자들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거나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건물 옥상이나 철탑 등 옥상에서 시위를 전개한다. 높은 공간이어서 위험하고 추위나 더위 또는 생리 처리에 지극히 불편한 데도 불구하고 이런 시위는 그치지 않는다.

최초의 고공농성자는 여성노동자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28일 밤 11시 평안도 평원고무공장 직공 강주룡(여, 31살)은 파업 중 광목 1절로 줄타기를 해 모란봉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였다.

그는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1백여 명의 일반인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뒤 9시간 30분 만에 경찰에 의해 끌려 내려온다.

우리 49명은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국은 평양의 2천3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서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중략)…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동광> 31년 7월 회견기).

일제가 만주침략을 앞두고 조선의 식민통치를 더욱 가중시키며 수탈을 자행하면서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1931년 1월 초에 함흥 편창 제사공장노동자 600여 명이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대우개선 등 12개 조의 요구조건을 제기하고 파업을 단행하였다. 처음부터 파업을 진압하기 위하여 경찰이 동원되었다. 파업직공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으며 핵심적인 파업 여직공 10여 명이 검속되었다. 600여 명의 파업직공들은 공장으로부터 함흥 부청에 이르는 대도로에서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파업직공들은 시위대열을 저지하려는 100여 명의 경찰과 맞섰다. 일제 경찰의 흑심한 탄압과 박해가 계속되었으나 파업직공들은 끝내 굴하지 않았다. 기업주는 공장문을 닫았다. 2월에는 광주에서, 3월에는 청진과 전남 보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한 감주룡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열 세 살 적에 서간도로 건너갔다.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20살 때에 통화현에 사는 5살 연하의 소년과 결혼하였다. 1년 후 남편이 항일무장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참여하자 그 역시 남편과 함께 활동했다.

5개월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22살 되던 해 남편이 사망하고 시가에서는 학대가 심해졌다. 먹고 살기 위해 평원고무공장에 취업하고, 사주의 임금착취와 일제경찰의 탄압에 노조를 결성, 투쟁의 리더가 되었다.

5~6월에는 평양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치열한 파업투쟁이 계속되었다.

혁명적 노조운동자들의 지도하에 전개된 평원 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은 완강성에 있어서 특출하였다. 불경기를 구실로 임금을 인하하려는 기업주들을 반대하여 궐기한 여공들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박차고 수차에 거친 버티기 투쟁과 단식투쟁, 시위와 공장습격을 단행하면서 견결히 싸웠다.

특히 이 파업의 지도자였으며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열렬한 참가자였던 강주룡은 일제경찰의 탄압과 공장주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투쟁의 선두에 서서 여공들을 힘차게 고무추동하였다.

강주룡은 모란봉 을밀대의 지붕 위에 올라가 9시간 반이나 버티면서 일제경찰의 간섭과 공장주의 횡포를 항의규탄하였으며 노동자들이 굳게 결속하여 이들과의 투쟁으로 나아갈 것을 열렬히 선동하였다. 경찰에게 체포되자 그는 단식투쟁으로써 이에 항거하였으며 당황한 경찰이 그를 석방하자 즉시 파업단 본부로 돌아가서 여공들의 투쟁을 계속 지도하였다. 그는 그후 다시 체포되어 일제 경찰과 용감히 싸우다가 희생되었다.(김인걸·강현욱, <일제하 조선노동운동사>)

고공농성장에서 끌려내려온 강주룡은 노조원 9명과 함께 평양경찰서에 구류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76시간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검속기간 만료로 풀려났다. 건강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파업단의 대표로 폐쇄한 공장문을 열라며 벌인 공장 습격사건으로 구금되고 이번에도 57시간 단식으로 맞섰다.

고공농성과 경찰수사, 두 차례의 단식으로 육신이 망가졌다.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경찰발표) 증세로 보석되었다가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의 집에서 숨졌다.

강주룡은 1930년대 전반기 혁명적 노동운동의 불길 한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단숨에 연소시킨 선진적 여성노동자이자 당시 수많은 쟁의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 땅 노동여성의 '대명사'로 후대 여성들 사이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권영숙, <한 고무공장 여성노동자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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