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이어질 결심
휘발되지만, 관계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곱씹게 돼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야기에는 성장과 추락이 등장한다. 모자란 주인공의 성장, 모든 걸 가진 사람의 추락처럼 오랜 시간 말과 글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상승과 하강의 장치가 서사 공식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시련과 모험을 극복한 주인공은 이야기가 시작했던 지점과 전혀 다른 상황과 상태에 도착한다. 주인공에게 일어난 변화의 격차가 크고 생생할수록 자극도 강렬해진다.
‘이슈’를 찾는 사람들도 변화에 주목한다. 오르고 내리는 것을 수치로 증명한 데이터는 이슈를 견고한 팩트로 만든다. 팩트가 생활에 닿는 면적이 넓으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된다. 노벨 문학상을 탄 올가 토카르축은 ‘이야기를 장악하고 그것을 엮어낸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출생률 감소, 물가 상승, 셀럽의 추락처럼 회의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친구들 모임에서도 수시로 화제가 되는 이야기들을 떠올려보자. 떠오르고 떠내려가는 것들이 주는 울렁거림. 세계를 지배하는 이야기의 주어는 ‘상승’이나 ‘하강’이라는 역동적 움직임 자체다.
수직적 증감의 자극에 중독된 우리는 수평적 연결의 감동을 놓치기 쉽다. 주인공의 서사는 관계를 통해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이다. ‘라이온 킹’의 심바는 티몬과 품바를 만나 라이온 킹이 된다. 알라딘은 지니와 마법 양탄자를 만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입장한다. 콩쥐는 팥쥐와 대적하며 강해지고,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연결과 관계는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오래 전 리차드와 파블로 바솔로뮤라는 생소한 이름의 인도 작가의 사진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전시는 두 명의 작가가 유사한 주제로 찍은 사진을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두 사진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관객이 스스로 느끼도록 기획되었다. 바솔로뮤라는 성으로 이어진 그들은 아빠와 아들 사이다. 25년의 시차를 두고 찍힌 사진들이 손 한 뼘만큼의 거리를 두고 놓였다. 두 사진은 ‘같은 공간’을 다른 시선으로 포착했고, ‘다른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봤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작가인 리차드의 작품과 그의 재능을 이어받아 국제적 사진작가가 된 아들 파블로의 작품을 교차로 바라보면 인도의 사회, 역사, 인권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각자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자신의 현실을 포착하고자 찍은 사진들을 나란히 놓았을 뿐인데, 한 장의 사진으론 드러나지 않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탄생했다. 놀라운 이야기를 만드는 비밀을 깨닫게 해준 전시였다.
내가 더 많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만남과 어울림의 화학작용 속에서만 가능한 의미가 담긴 이야기. 성장과 추락의 서사는 빠르게 흡수되고 쉽게 휘발되지만, 관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오래 곱씹을수록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자극적 장치 없이도 훨씬 진한 맛이 우러나는 비법은 탁월한 연결의 안목일 것이다.
새해마다 나의 성장을 바라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실력과 자산은 키우고 몸무게는 줄길 바랐다. 반복되는 일상을 연말이란 기회로 회고해 보면 정작 늘어난 건 주름과 나이뿐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작은 변화들이 있다. 잠이 많던 나는 아이를 만나고 아이가 아프면 수시로 깨 그의 열을 체크하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팀원을 만나 이전과 다른 생각과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이전의 나와는 다르고 그 다름은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든다. 분명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한 변화다.
재미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말에서 시작과 다른 지점에 있다.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의 결말은 혼자였던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마무리된다. 연결과 어울림은 세계를 장악할 거창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누가 나의 티몬이 되어줄지, 아니면 내가 누군가의 품바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 많은 것들과 다정히 이어질 결심을 하기에 딱 좋은 한 해의 시작이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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