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안의 시시각각] 모비딕은 잠시 잊자
알라딘 서점 고전 부문 3위를 비롯해 요즘 책방마다 허먼 멜빌이 173년 전 발표한 소설 『모비 딕』이 베스트셀러다. 비결은 책을 감싼 띠종이에 적혀 있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예비 고교생에게 이 책을 선물한 사연이 화제에 오른 덕이다. 이전까지 문구는 ‘우영우가 읽은 소설’이었다. 드라마 속 ‘이상한 변호사’보다 현존하는 ‘실세 검사’가 돈이 된다는 출판계의 직감이 띠지 교체로 이어졌다.
이런 현상이 거슬렸을까. 조국 전 장관이 토를 달았다. 지난 5일 페이스북에 “모비 딕 리더십은 선장의 광기 어린 사명 의식으로 선원을 모두 죽이는 리더십”이라고 올렸다. 그는 한 위원장이 모비 딕으로 삼는 대상이 “(더불어)민주당 또는 운동권”이라고 짐작했다. 책 선물까지 시비를 거나 싶지만, 한 위원장이 민주당에 보인 태도가 고래에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 딕을 공격하는 양태와 닮긴 했다.
여야가 서로에게 작살 던지는 정치
고래 죽이기에 목숨 거는 소설 닮아
지난해 9월 이재명 대표가 단식 19일 만에 병원에 이송되자 “수사받던 피의자가 단식해서, 자해한다고…”라고 말했다. 그의 비대위원장 취임 일성은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운동권 특권 세력과 싸울 것”이었다.
이런 한 위원장을 탓하는 민주당이 실은 고래 사냥의 원조다. 민주당의 모비 딕은 검찰이었다. 조 전 장관을 필두로 추미애·박범계 전 장관이 릴레이로 검찰에 작살을 날렸다. 여야 협의를 짓밟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과 공수처 설립을 강행했다.
결과는 반전 스릴러에 가깝다. 검찰에서 수사권을 조금 빼앗고선 정권을 줬다. 집권당의 당권까지 검사 수중에 들어갔다. 민주당이 성토하는 ‘검찰공화국’의 산파가 바로 민주당이다.
수사 구조 개악의 폐해는 또 어떤가. 지난 12일 봉준호 감독은 배우 고(故) 이선균의 죽음을 규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검사 지휘라는 경찰 수사의 검증 장치를 덜컥 없애 마약 성분이 검출도 안 된 배우를 세 번이나 경찰서 포토라인에 세우는 동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일말의 자책감이나마 느꼈을까.
모비 딕 사냥은 현실에서도 허망할 뿐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은 판사가 기각했다. 한 위원장은 모비 딕 등장인물 가운데 스타벅스 창업주들이 이름을 따간 덕분에 가장 유명해진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
한 위원장이 내놓은 여당 공천 원칙을 스타벅 스타일로 표현하면 “불체포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자,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 쯤 된다. 얼핏 여당의 자성 같지만 지난 20개월의 검찰 행보를 보면 야당 압박용에 가깝다. 불체포특권은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해야만 의미가 있다. 현 정부 검찰은 야당 수사에 집중해왔다. 국회에 체포동의안이 넘어온 빈도를 봐도 국민의힘 출신은 한 번(하영제)뿐인데 비해 야당 출신은 다섯 번(노웅래·이재명·이성만·윤관석·이재명)이다. 앞으로도 체포동의안은 야당 의원용일 가능성이 크니 한 위원장의 선언은 특권 포기가 아니라 검찰의 후반기 모비 딕 사냥을 위한 밑밥 정도로 여겨진다.
위기서 국민 구출할 상생 정치 절실
상대를 해할 궁리만 하는 여야는 발밑을 안 본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배에 물이 차오르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70대 이상 인구(631만 명)가 20대 인구(619만 명)를 넘어섰다(2023 주민등록 인구통계). 20대 이하는 가구주의 가구소득(3114만원)에서 60대 이상(3189만원)에게 역전 당하며 가장 가난한 세대가 됐다(한국의 사회동향 2023). 불우한 20대는 점점 늘어나는 70대를 부양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급선무는 모비 딕을 쫓는 복수가 아니라 일단 힘을 합쳐 안전지대에 당도하는 피난이다. 눈에 핏발 선 작살잡이 대신 조화롭게 배를 몰고 갈 항해사를 태워야 한다. 배가 가라앉기 전에.
강주안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 이름이 뭐라고!""이길여!"…92세 총장, 그날 왜 말춤 췄나 | 중앙일보
- 뉴진스 민지, 칼국수 발언 뭐길래…결국 사과문까지 올렸다 | 중앙일보
- 누군 월 95만원, 누군 41만원…연금액 가른 건 바로 이 '마법' | 중앙일보
- 이정후 "내 동생이랑 연애? 왜?"…MLB까지 소문난 '바람의 가문' | 중앙일보
- 의사 자식들은 공부 잘할까…쌍둥이가 알려준 ‘IQ 진실’ [hello! Parents] | 중앙일보
- 수영복 화보 찍던 베트남 모델, 누운채 오토바이 타다 감옥갈 판 | 중앙일보
- "이선균 산산조각 났다, 일종의 청교도주의" 프랑스 언론의 일침 | 중앙일보
- 절박·찐팬·조직력 '3박자'…돌아온 트럼프, 더 세졌다 | 중앙일보
- 밸리댄스 가르치다, 장례 가르친다…일자리 빼앗는 저출산 공포 [저출산이 뒤바꾼 대한민국] |
- "비장의 무기" 조삼달 다녀간 그곳…제주 '사진 명당' 어디 [GO로케]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