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태영의 뼈
“뼈를 깎는다”는 말을 곱씹게 됐다. 지난 11일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에 들어간 태영건설을 두고서다. 가까스로 워크아웃을 개시하기까지 태영이 보인 행태는 여러 면에서 뼈 깎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제 한파에 쏟아질 수 있는 ‘K-워크아웃’에 앞서 징비록(懲毖錄)으로 삼을 만하다.
워크아웃 설이 돈 건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12월 유동성 위기로 자금난을 겪는다는 소문에 대해 태영건설은 “워크아웃 신청을 검토한다는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경영 정상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나,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된 바는 없다”고 공시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워크아웃을 기습 신청했다.
지난 3일 채권단 설명회에서 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이 “뼈를 깎겠다”며 눈물로 읽어내려간 호소문은 어떨까. 사주 일가의 사재 출연이나 알짜 회사인 SBS 지분 매각 가능성이 빠진 ‘맹탕’이었다. 윤 회장은 “태영을 포기하는 것은 저만의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국가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힐까 봐 너무나 두렵다”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 ‘워크아웃을 받아주지 않으면 국민이 피해를 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태영인더스트리 지분을 매각한 대금 1549억원 중 659억원만 태영건설을 살리는 데 쓰고 나머지 대부분을 그룹 지주사인 TY홀딩스가 연대 보증한 채무를 갚는 데 쓴 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태영건설 대신 경영권을 지키는 데 매각 대금을 쓴 셈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남의 뼈를 깎는 자구계획”이라고 꼬집은 배경이다.
지난 8일엔 TY홀딩스가 윤 회장의 딸인 윤재연 블루원 대표에게 330억원을 빌린다고 공시했다. SBS 주식 117만2000주를 담보로 제공하는 조건이다. 추후 태영건설 상황이 나빠질 경우 딸이 SBS 지분을 가져갈 수 있다는 얘기다. 사재 출연이 아닌 사재 대여 형식이라 승계를 염두에 둔 ‘신종 증여’란 지적이 나왔다.
워크아웃은 회사를 살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채권단이 부실기업의 빚을 깎아주고, 이자를 면제해주고, 신규 자금도 지원한다. 채권단의 주축이 국민 혈세로 운영하는 산업은행이기에 특혜 시비가 따라붙는다. ‘뼈를 깎는’ 노력이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과거 워크아웃 과정에서 두산은 두산인프라코어, 금호는 아시아나항공을 팔았다. 두 회사 모두에게 둘도 없는 ‘알짜’였다. 태영도 부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가장 뺏기기 싫은 알짜부터 내어줘야 워크아웃의 명분이 선다. 살을 베어도 아픈데, 뼈를 깎겠다니 하는 얘기다.
김기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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