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댓글 각오한 거장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

김상목 2024. 1. 1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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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나의 올드 오크>

[김상목 기자]

 영화 <나의 올드 오크>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1936년생, 몇 번이고 은퇴를 번복하며 여기까지 이른 90에 가까워진 감독의 아마도 마지막 장편영화가 도착했다.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해지기도 한다. 기대에 어긋나면 어떻게 하지? 혹은 어찌할 수 없는 매너리즘 답습으로 그치지 않을까? 같은 의문부호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가 가장 잘 해낼 것 같은 소재이긴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말자 하며 영화를 확인했다. 아슬아슬한 지점도, 좀 늘어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애착을 갖고 대하는 감독이긴 해도 구멍이 보이는 걸 아니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빠심'으로 영화와 감독을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켄 로치는 '과대평가'받는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듣는 감독이다. 특히 예술영화 거장들의 총본산이라 할 칸영화제가 그를 환대하고 칭송하는 게 감독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영화제 정치' 관련 칸의 노회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간주할 법하다. 사실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켄 로치가 과연 칸에 가고 못 가고에 일희일비할 감독일까 한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주장할 생각이다. 일면식도 없는 관계이지만 그렇게 믿는다.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를 영화평론가와 매체가 떠받들며 상찬하는 것보다 그 영화 속에서 숨 쉬는 등장인물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바깥세상의 관객들이 자기 영화를 팝콘 씹어가며 접하길 고대하는 사람이란 믿음 때문일 테다.

그런 감독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그의 마지막 영화에서도 차고 넘치도록 충족된다. 그 정도면 충분히 족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라본 <나의 올드 오크>는 지독히 감독다운,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다.

쇠락한 탄광촌에 도착한 '불청객'들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감독의 영화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영국 북동부의 쇠락 수준을 넘어 소멸해가는 폐광촌 동네에 어느 날 한 대의 버스가 정차한다. 길가에서 하릴없이 노닥거리던 주민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격앙된다. EU에서 분배한 영국 몫의 시리아 난민 중 일부가 이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난민들을 거칠게 대하기 시작한다. 꼬투리만 잡히면 없는 핑계도 만들어 시비를 건다.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만 걸려라 하는 분위기다. 기름에 불을 붓듯 한 난민 소녀가 차 안에서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사람들이 그만 하라며 말리지만 한 남자가 소녀의 카메라를 빼앗는다. 장난이라면 심한 수준으로 괴롭히던 중 그만 카메라를 떨어트려 파손되고 만다. 마을에서 펍을 운영하던 'TJ'는 그 현장을 목격한다.

얼마 후 TJ가 운영하는 펍으로 난민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야라'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소녀는 카메라를 부순 남자의 신원을 묻는다. 하지만 TJ로선 곤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작은 동네에서 뉴스의 중심이라 할 펍 주인이니 누군지는 너무나 잘 아는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는 펍 뒷방에 있던 오래된 카메라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야라는 카메라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하다. 상황을 파악한 TJ는 대신에 시내 나가는 길에 카메라 수리를 맡겨주겠다 한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시리아 난민들을 도와주려 한다. 주민 상당수는 딱한 사정이긴 하다며 관망한다. '올드 오크' 펍 단골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까지 가는 수준은 아니다. 그들은 차별하려는 건 아니지만 왜 굳이 부자동네엔 안 보내고 이 동네처럼 망해가는 가난한 시골에만 난민들을 보내느냐며 항변한다. 학교에 다니게 된 난민 청소년들에 대한 학교폭력도 이어진다. 물론 사회단체 활동가의 지원도, 어쨌든 한 동네 살게 되었으니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언어의 차이나 이미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이슬람권 난민에 대한 혐오는 쉽게 극복될 성질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야라는 TJ가 중고 카메라를 보여준 방에서 그가 발견한 사진 속 아이템에 착안해 모종의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부엌 숟가락 개수까지 꿸 극한의 사실주의 영화

'올드 오크'란 이름의 펍은 하루하루 동네 단골(이자 술꾼들) 장사로 겨우 견디는 허물어져가는 가게다. 광부 출신인 TJ는 광산이 문을 닫는 과정에서 펍을 차려 근근이 운영하는 중이다. 단골 역시 어릴 적부터 옆 집 숟가락 개수까지 사정 빤하게 잘 아는 이웃과 동네 선후배 친구들이다. 그들 대다수는 시리아 난민 유입에 적대적이다. 세상 모든 불만을 그들에게 쏟아낼 기세다. TJ는 그들의 불평이 불편하긴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는다. 하지만 야라를 통해 난민들의 사정을 접하고 나니 친구들이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늘어놓는 푸념을 그냥 넘기기가 갈수록 어렵다. 한없이 늘어지는 비난과 매도가 편할 턱없으니 말이다. 그런 기색을 느낀 오래된 단골들과 TJ 사이는 점점 험악해진다. 그런 가운데 난민을 돕는 지역 사회활동가 '로라'와 '야라'가 의기투합해 TJ에게 제안한 사업을 고심 끝에 받아들이게 된다.

<나의 올드 오크>는 우리가 상상하는 켄 로치의 영화 속 요소를 거의 빠짐없이 담아낸 '익숙한' 형태의 작업이다. 그만이 해낼 수 있는 통찰과 소박한 의지가 가득한 그런 영화다. 특별히 새로운 주제를 제기하거나 예술적 도전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간단한 이야기를 차분하지만 단호한 의지와 믿음으로 풀어나간다. 21세기 영상언어 실험 같은 건 켄 로치와는 아득히 멀다. 대신 실제 우리 동네 단골 펍에서 일어날 법한 소소하지만 지독히 사실적인 사건사고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그 끝에는 작은 변화 혹은 변화를 위한 의지의 확인으로 귀결된다. 그게 전부다.

전통적인 서사적 구조 안에서 영국 사회파 영화는 물론 미술 등 전반적인 예술사조 중 하나로 자리 잡은 '키친싱크 리얼리즘'의 계승자로서 해당 경향을 풀이하는 정석적 표현을 구현한다. 사회적 쟁점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작업이 뭐가 특별할까 싶지만 괴팍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영국의 리얼리즘은 차원이 다르긴 하다. 영화를 봐야 이해될 지점이다. 그래도 풀이해 본다면, 그릇이나 냄비 자리만 조금 바뀌어도 금방 알아챌 만큼 생생하게 사실적 풍경을 구현한다고 보면 충분할 테다.

그런 사실주의적 극한의 추구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마치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각박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핑계로 우리가 너무나 쉽게 외면하곤 하는 '시민의식'의 복원이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언급하지만 정작 그 개념에 담긴 함의는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적 유래와 본질적 의미를 켄 로치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요즘 세태라면 '선비 짓'이나 '훈장질'한다는 악성댓글 달리기 딱 좋은 먹잇감이란 걸 알면서도 단호하게 밀어붙인다.

예술영화 틀로는 오히려 낯설어져버리는 영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세상이 더 나빠지고 있음을 그는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을 외면하고 예술이니 미학이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항변처럼 켄 로치는 영화를 만든다. 그렇다고 독선적으로 타인의 작업을 매도하거나 규탄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선 타협하거나 선회할 일은 절대 없어 보이는 그런 자세다. 켄 로치에 대한 대표적 오해 혹은 엇갈린 판단은 그가 특히 한국에선 칸영화제의 총아로 소개되었기 때문일 테다. 켄 로치는 90에 가까운 경력만큼 반세기 훌쩍 넘긴 오랜 시간 동안 방대한 결과물을 선보여 왔다.

하지만 우리에겐 켄 로치는 1990년대 이후 정작 자신의 고국에선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유럽예술영화와 영화제의 자원과 찬사로 작업을 이어가면서 소개되다 보니 비교대상이나 척도가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그는 일평생 노동계급의 입장을 공유하고 지지하며 당대 영국의 사회상을 기록해 왔건만 우리는 자꾸만 예술영화 거장이란 본인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강제로 입혀온 것이다. 정작 감독 본인은 생각도 안 해봤을 대접일 테다.

감독을 향한 예술영화계의 찬사는 자신들이 놓쳤거나 잃어버린 어떤 원형에 대해, 또는 지나친 형식미학에 경도되어 순전한 삶과 세상에 대해 힘들어진 발언의 복원을 향한 것일 텐데, 한국의 독립예술영화 관객은 자꾸만 예술영화 취향에다 켄 로치의 영화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억지로 끼워 맞추는 무익한 도전을 거듭하고 있진 않은지 자문해볼 필요가 조금 있다.

그래서 켄 로치의 영화를 볼 때 흔히 '시네필'적 접근은 오히려 영화와의 순전한 만남을 훼방하는 엉뚱한 렌즈 혹은 필터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 차라리 그냥 여럿이 왈가왈부해가며 드라마 고르듯 우연히 선택해 함께 보면서 품평하는 게 더 작가적 의도에 더 걸맞지 않을까 싶다. 켄 로치의 영화를 접할 때는 (개별 작업의 완성도 편차는 명백히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런 접근법 선택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오래된 미래', 억압받는 이들의 연대 복원 메시지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다시 영화 속 세계로 돌아가 보자.

<나의 올드 오크>는 낯선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한쪽에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부 치하에서 진행된 산업구조조정과 노조 탄압의 결과로 붕괴된 채 의도적으로 방치된 영국 북동부 폐광촌과 노동계급의 몰락한 후예들, 다른 한쪽에는 (제국주의 치하에서 물려받은 부정적 유산들의 결과로) 내전으로 황폐해진 조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해 자신들을 전혀 환영하지 않는 부자나라로 '운수 좋은 날' 도착한 아랍 난민들이 위치한다.

'토박이'들은 새로운 '이주자'를 반길 기미가 없다. 여기까지라면 근래 쏟아져 나오는, 어느새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다뤄지기 시작한 사회갈등 소재의 진부한 설정에 불과할 테다. 그러나 '거장'의 터치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다. 물론 파격적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식은 아니다. 켄 로치는 부엌에서 주변을 살피듯 조망하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우리가 제대로 목격한 것과 실체가 없는 허깨비 악의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분간해 가면서 관객들과 대화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쩌면 눈치 빠른 이들은 감독이 이 대목에서 슬슬 특정 쟁점에 대해 제기하려는 것을 반보 정도 일찍 간파할 수 있을 테다. 해당 쟁점 혹은 감독이 전작들에서 설파해왔던 주제에 대해 숙지해온 이들이라면 영화 내내 마치 교육영상 교재처럼 전개되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몇 부로 나눠진 시사토론처럼 받아들여질 테다. 그래서 영화가 진부하고 계몽적이라며 하품할 이들도 필히 나올 법하다.

켄 로치는 TV 영화로 경력을 출발한 만큼, 그의 영화는 21세기 들어 예술영화계에서 각광을 받는 독창적인 영상문법과는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TV문학관 단막극을 보는 기분이 들 만큼 전통적인 이야기 서사에 치중하는 구조다. 그렇지만 그 대신에 세상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과 관심, 그리고 비전문배우 기용을 통한 리얼리티 추구, 역사에 대한 천착을 통한 고증의 치밀함 등은 티가 나지 않지만 강렬한 미덕으로 기능한다.

켄 로치의 전작들 속에서 꾸준히 제기되어온 주제들,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노동계급'이 단결과 연대로 쟁취했던 결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무너진 역사의 쓰라린 교훈, 그리고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 억압을 당하는 노동계급에 대한 연대의식의 기억이 <나의 올드 오크>에선 21세기 들어 일국적으로는 노동계급의 몰락과 양극화된 빈부격차, 초국적 차원에선 개별 국가를 넘어 확산되는 내전과 난민 문제의 심각함을 통해 재구성된다.

그 해답은 결국 '온고지신'으로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서 TJ와 야라가 처음으로 공감하게 되는 계기가 TJ 본인은 물론 가족과 이웃들이 투쟁하고 패배했던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기도 한) 영국 광산노조 파업 당시 사진들이란 건 영화 속 메시지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기능한다. 그리고 영화 전체의 전환점이 될 사진과 문장도 여기 숨어 있다.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

거장의 진심이 가득 담긴 덕담은 존중받을 만하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럼에도 특별할 것 없이 감독이 누누이 설파해온 동어반복 아니냐는 품평은 이어질 테다. 하지만 여기에서 과감히 주장하고 싶은 건 '그래서 뭐가 문제냐?'다. 켄 로치 정도 되는 선수가 이만큼 솜씨 좋게 현재 영화 속 영국은 물론 한국사회, 아니 전 세계가 직면한 태풍의 눈 같은 주제에 대해 술술 풀어내주는데 뭐를 더 기대하고 바라느냐는 것이다. 애초에 켄 로치는 대중영화를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이 평생 견지해온 주제와 소신을 채워 넣어온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말이다.

그리고 켄 로치는 영화 속에서 TJ와 반목하는 동네 단골들의 악담조차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좌절과 몰락,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역사적 배경에 대해 찬찬히 진단하고 해설하는 건 물론, 그들이 어떤 지점에 억울해 하는지, 그리고 이성적으론 수긍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의 제약들을 공정하게 소개하는 데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대사와 표정 처리 하나하나 뜯어보면 얼마나 세밀하게 작업했는지 이해될 테다.

그런 '디테일'과 감독의 노동계급 연대에 대한 소신을 화학적으로 결합해낸 결과는 결국 만나야만 하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연민을 기반으로 하는 '연대'다. 지나치게 이상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현실의 복잡다단한 단면 속에는 '이상주의'만으로 소화하기 불가능한 수많은 모순과 우발적 비극이 가득하다는 걸 우리는 일상과 주변에서 숱하게 접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영화에서 결정적 전환점으로 기능하는 몇 개의 이미지가 훼손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차이'가 연대의식에 의해 일거에 눈 녹듯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걸 영화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오히려 초반의 연민을 자양분으로 삼은 유대가 깊어질수록 그들 간의 차이가 더 두드러지게 튀어나올 것을 영화는 굳이 숨기지 않는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은 투쟁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자신의 석양이 저물었음을 고백하는 마지막 인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겸허한 자세에 기반을 두고 펼치는 '연대'의 자세가 국경을 넘어서는 노동계급 연대의 출발이자 모두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방향이란 데 동의한다면 이 영화 속 주제의식과 결말에 대한 이견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원래 정답은 심심하고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장의 고별사를 경청할 때는 좀 지루해도 좋은 점만 취하면 좋지 아니한가.
 
<작품정보>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
2023|영국|드라마
2024.01.17. 개봉|113분|15세 관람가
감독 켄 로치
각본 폴 래버티
출연 데이브 터너(TJ 역), 에블라 마리(야라 역)
수입·배급·제공 ㈜영화사 진진
공동제공 ㈜KNN미디어플러스
 
2023 76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공식 초청
2023 76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관객상
2023 68회 바야돌리드국제영화제 관객상
2023 50회 겐트영화제 관객상(North Sea Port Audience Award)
2023 24회 캘거리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 관객상
2023 35회 서드베리국제영화제 관객상-최우수 작품상
2023 30회 팔리치유럽영화제 관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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