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상 휩쓴 이성진 감독 "LA 왔을 때 통장잔고 -63센트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에서 8관왕을 차지했다. 앞서 골든글로브 3관왕(작품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 크리틱스 초이스 4관왕(작품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에 이은 성과다. 2022년 시상식에선 '오징어 게임'이 감독상(황동혁)과 남우주연상(이정재)을 받은 바 있다.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피콕 극장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성난 사람들’은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에서 작품상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각본을 쓰고 연출·제작까지 맡은 한국계 이성진 감독(43)은 감독상과 작가상을 받았고, 극 중 주인공 대니를 연기한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41)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중국·베트남계 배우 앨리 웡(42)은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아시아계 배우 두 명이 동시에 남녀주연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캐스팅상·의상상·편집상까지 이날 '성난 사람들'이 받은 상은 총 8개다. 후보에 오른 11개 부문 중 남녀조연상과 음악상을 제외하고 모두 휩쓸었다. 뉴욕타임스,NBC 등 현지언론은 "압도했다" "싹쓸이했다" 등의 표현을 쓰며, '성난 사람들'의 수상소식을 앞다퉈 보도했다. 드라마 부문의 작품상은 HBO 시리즈 '석세션'에, 코미디 부문은 FX의 '더 베어'에 돌아갔다.
" “세상을 살다 보면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이성진 감독은 수상 소감을 통해 자신이 작품에 천착하게 된 배경을 이같이 밝혔다. “작품 초반 등장인물(대니)의 자살 충동은 사실 제가 겪었던 감정들을 녹여낸 것”이라며 “작품을 보고 자신의 어려운 경험을 털어놔 주신 분들을 통해 제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가끔씩 세상이 사람들을 갈라 놓으려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시상식에서조차 누군가는 트로피를 가져가고 누구는 가져가지 못한다”면서 “‘성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좋았던 점은 조건 없이 사랑해준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처음 LA에 왔을 때 돈이 없어서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 63센트였다”며 “그걸 메꾸기 위해 1달러를 저금하러 갔는데 ‘정말 1달러 저금하시는 거예요?’라고 묻더라”라고 말했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던 제가 이런 것(트로피)을 들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과거 ‘소니 리’(Sonny Lee)라는 미국식 이름을 쓰던 그는 봉준호·박찬욱 등 한국 이름으로 국제 무대에 선 감독들을 보고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원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스티븐 연은 ‘성난 사람들’을 통해 골든글로브, 크리틱스초이스상에 이어 에미상에서도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판단을 하는 건 쉽지만, 남에게 공감하는 건 어렵다”고 수상 소감을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촬영 중 힘들어하던 자신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준 동료와의 일화를 언급하며 “솔직히 대니로서 살아가기 힘든 날들도 있었고, 그를 멋대로 판단하고 조롱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어 “편견과 수치심은 아주 외로운 것이지만, 동정과 은혜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 경계에 선 이민자의 삶…우울·분노에 공감”
‘성난 사람들’의 원제 ‘비프(BEEF)’는 불평 또는 불평해대는 것을 뜻한다. 드라마는 운전 중 벌어진 사소한 시비가 복수, 해코지로 이어지며 일파만파 커지는 과정을 10부작에 담았다. 지난해 4월 공개 후 넷플릭스 시청 시간 10위 안에 5주 연속 이름을 올리는 등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불평불만 가득한 두 주인공은 한국계 미국인 대니(스티븐 연)와 베트남계 미국인 에이미(앨리 웡), 모두 이민자들이다. 집 수리 일을 하는 대니가 극 중 가족이나 친척들과 한국어로 대화하거나, 한인 교회가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성공한 여성 사업가 에이미는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삶을 살지만, 남편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부담감,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부채감 등에 짓눌려 있는 인물이다.
드라마는 이들을 통해 이민자들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늘 우울과 분노로 차 있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모습을 동시에 담아냈다.
'성난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큰 공감대를 얻은 배경에 대해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전 세계가 로컬(지역)에서 글로벌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 과거엔 각자 문화의 경계가 분명하고 이질적이었는데, 이제는 그 경계가 흐릿하고 겹치는 모습을 보인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여러 문화를 흡수한 경계인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데 한인들, 이민자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분석했다.
작품이 에미상을 포함해 골든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 등에서 많은 트로피를 받은 것에 대해선 “미국 사회가 작품 속 인물들을 ‘우리와 다른 (이민자의) 삶’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보편적인 삶’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짚었다.
어환희·황지영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선균 산산조각 났다, 일종의 청교도주의" 프랑스 언론의 일침 | 중앙일보
- 한동훈 “그날 지우고 싶다” 2006년 9~10월 무슨 일이 ⑦ | 중앙일보
- 몇 입만 먹어도 뱃속서 부푼다, 특전사들이 먹는 ‘벽돌’ 정체 | 중앙일보
- 탕후루집 옆에 탕후루집 차린 70만 유튜버…"상도덕 없다" 논란 | 중앙일보
- '집단 성폭행' 최종훈 "보여드리겠다"…5년 만에 복귀 움직임 | 중앙일보
- 장성규 "저질이네"…바지 분실 한인 세탁소에 수백억 소송 분노 | 중앙일보
- 박민영 "다 지겹다"…전 연인 강종현 돈 2.5억 수수설에 한 말 | 중앙일보
- '국평' 84㎡ 분양가가 44억…강남 뺨친 청약 최고가 '이 동네' | 중앙일보
- 예술적 유방암 수술, 정승필…그는 '공감요정'이라 불린다 [닥터 후 시즌Ⅱ] | 중앙일보
- 22세 '현역' 미 공군장교…사상 첫 '미스 아메리카' 왕관 썼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