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증거 있는데도…바뀐 형소법에 '원정살인' 피고인 석방됐다
2020년 1월 억대의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해외에서 지인 A씨를 살해한 의혹을 받는 피고인 B씨와 C씨는 지난해 5월 각각 강도살인과 사기미수 등 혐의로 검찰에 구속기소됐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피고인들의 휴대전화·태블릿에 대한 디지털포렌식과 주거지 압수수색 등을 통해 증거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B씨와 C씨, 현지 여행사 직원들의 혐의에 관한 진술도 받아냈다. B씨가 향정신성의약품을 먹인 후 A씨를 질식사시켰다는 것으로 잠정적인 수사 결론이 났다. 피고인들을 재판에 넘기며 제출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에도 이들의 진술이 그대로 담겼다.
그런데 막상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들은 일부 자백했던 부분을 포함해 검찰에서 한 기존 진술을 전부 부인하고 진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검찰의 조서는 법원에 제출조차 할 수 없었다. 피고인이 부인한 검찰 진술조서는 증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새롭게 범행을 입증하기 위한 법정 레이스가 또다시 시작됐다. 이후 약 7개월 동안 재판에선 증인 18명에 대한 증인신문, 추가 증거제출 등으로 재판은 장기화됐다. 그 사이 구속됐던 피고인들 모두 구속기간(1심 6개월) 만료로 석방됐다. 이들은 법정에선 “A씨가 자연사했을 수도 있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바뀐 형소법에 길어진 ‘법원 2차전’과 피해회복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신문조서)는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그 내용을 공판에서 인정할 때에 한해 증거로 할 수 있다’는 개정 형사소송법 312조①항이 2022년 1월부터 시행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전엔 피고인이 조서 내용을 부인하더라도 영상녹화물 등 객관적 방법에 의해 피고인의 진술 내용과 피신조서 내용이 똑같다는 점이 증명되면 증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조서에 기재된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특신상태)에서 행해졌다는 게 입증된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법정책연구원 등에 따르면 검찰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제한은 모든 증거는 밀폐된 수사기관의 조사실이 아닌 공개된 재판에 드러내 심판한다는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됐다. 조서를 먼저 읽은 법관의 선입견 형성을 막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담겼다. 그러나 좋은 의도와 달리 다양한 나비효과로 부작용이 나타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부작용이 재판 장기화 문제다. ‘300억원대 깡통전세 사기 사건’이 그런 사례다. 검찰은 2022년 2월 160여명에 전세보증금이 매매가를 웃도는 깡통전세 오피스텔을 월세 매물로 속여 팔아 325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일당 4명을 구속기소했지만 이들도 ‘법정 부인’ 전략을 썼다. 수사과정에서 혐의를 인정했던 공범들이 부인하면서 주범과 공범 간 공모관계 입증을 위해 증인신문이 길어졌고, 1심 재판은 2년째 공전하고 있다.
“방청석에 조직원 있을까” 법정 진술의 어려움
검찰에선 검찰 조사실보다 공개 재판정에서 진술이 더 자유롭지 못하고 실체적 진실 발견을 저해한다는 시각도 있다. 한 수도권 지검 부장검사는 “조직폭력배들이 가담한 강력사건이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특수사건의 경우 조직·정당원 등이 방청석에 앉아 있으면 후환이 두려워 조사실에서 진술한 내용대로 증언하기 더 어려운 문제도 있다”며 “이 경우 법 개정 취지의 하나인 ‘진술 임의성’이 더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2022년 10월 뇌물 및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뒤, 지난해 3월 불법 대북송금 혐의로 추가 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경우가 그랬다. 이 전 부지사는 지난해 7월 검찰에서 “쌍방울의 이재명 대표 방북비용 대납 계획을 구두로 이 대표에게 보고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가 정작 재판에선 이 전 부지사의 아내 백모씨가 방청석에 나와 “(변호인이) 없는 일을 얘기했다.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소리치며 변호인을 해임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이 전 부지사는 진술을 다시 번복했고 재판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해외선 영상조서, 법관 증거조사 의해 인정…韓 ‘조사자 증언’도 어려워
해외의 경우 검찰 신문조서가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독일은 일부 영상녹화가 병행된 조서는 법관의 직접적인 증거조사(직접주의)에 의해 증거로 인정될 수 있다. 프랑스 역시 법관의 자유로운 판단에 의해 곧바로 증거로 사용된다. 영국의 경우 원칙적으로 녹음·녹화를 통해 수집한 진술 중 피의자의 자백은 증거로 인정한다.
특별수사와 공판 경험이 많은 법조계 관계자는 “법 개정 후 한국에선 피고인의 말 한마디로 장기간 수사 결과가 전면 부인되다 보니 위증까지 쉽게 일어나는 분위기”라며 “최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사건에선 증인이 민주당 측 인사의 부탁을 받고 변호사까지 가담해 위조증거(김 전 부원장의 휴대전화 거짓 일정표)를 제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안으론 신문조서를 작성한 검사를 증인으로 채택해 증언을 듣는 ‘조사자 증언제도’가 거론되지만 현장에선 여의치 않다고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변호인이 ‘형사소송법은 증거에서 검찰 조서를 배제하는 취지’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재판부가 조사 검사를 증인으로 채택되는 것 자체가 어렵다”며 “법 개정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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