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시험이 같아지면 목표도 같아진다
이공계 경쟁력 약화는 물론
대학 인재 배출 시기 늦출 것
인문계 경쟁력 높이지도 못해
같은 과정, 비슷한 공부해
모든 수험생 목표 같아지는
시스템에 미래 맡겨도 될까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 고등학생들의 대학 서열 놀이는 ‘서연고서성한…’으로 이어졌다. 경찰대와 육사가 이 6개 학교 사이에 들어 있었고, 사정에 따라 일부는 좋은 성적임에도 지역의 국립대를 선택하기도 했다.
요즘 서열 놀이는 많이 달라졌다. ‘의치한약수설카포…’로 이어진다고 한다. 의대, 치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가 앞이고 그다음이 서울대의 의치한약수 이외 과라는 것이다. 서울대 다음도 연세대와 고려대가 아니라 카이스트와 포항공대가 언급된다. 연고대의 공대 일부 과들이 더 선호도가 높지만 인문계를 포함한 전체 서열은 이공계 특화 대학인 카이스트와 포항공대가 더 높다는 의미다. 우수한 학생 대다수가 의학 계열을 1순위로 고려하는 세태는 다소 아쉽지만 계열 지망이 대학 이름만 보고 지망하는 것보다 우선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덴 긍정적 측면이 있다.
대입에서 이공계의 약진은 사회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문과 출신이 필요한 일자리 수는 줄어들고 이과 출신이 필요한 일자리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오래전부터 이공계 인재 배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정부도 학생들의 전공 적합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시제도를 변화시켜 왔다. 전공에 대한 학생의 관심과 심화학습 정도를 생활기록부에 적극 기재하도록 하고 이를 대학이 중요하게 평가하도록 했다. 2025년부터는 고교학점제도 도입된다. 진로를 일찌감치 정하고 그에 맞춰 학습하는 게 학생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득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현실도 전공 적합성 강조의 배경이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오는 3월 초등학교에 입학할 학생은 사상 처음 40만명 미만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3년 후에는 30만명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학령인구가 가파르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찍 전공을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해당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를 적시에 확보하는 건 기업과 국가 경쟁력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데 최근 교육 당국이 발표한 ‘2028학년도 대입 개편안’은 이 같은 흐름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개편안의 골자는 국어·수학·사회·과학 등에서 선택 과목을 없앤 것이다. 소위 ‘심화수학’(미적분Ⅱ·기하)이 사교육을 유발하고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게 주된 이유인데 선택한 과목이 다른 탓에 발생하는 수험생들의 유불리를 없애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소위 ‘문과 침공’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지만 자칫 이공계 전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공계 학습에 필수적인 심화수학은 학습량이 일반 수학 과목의 2배 이상인데 고등학교에서 심화수학을 공부하지 않고 이공계로 진학하면 결국 이 부분 학습을 위해 대학 생활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고교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과목을 대학에서 학습해야 한다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의 배출 시기는 늦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개편안을 통해 인문계의 경쟁력이 높아질 것 같지도 않다. 지금은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 심화수학 등에 대한 부담 등으로 처음부터 인문계를 지망하고 관련 분야를 더 파고드는 학생들이 꽤 있지만 이 수는 더 줄어들 확률이 높다. 모든 수험생의 시험과목이 같아진다면 그들의 목표 또한 같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험과목이 같아진 후에도 비슷한 선호 추세가 유지된다면 거의 모든 상위권 수험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비율로 의치한약수를 지망하게 될 개연성이 높다. 의치한약수 집중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성적에 따라 취업률과 선호도가 높은 이공계 인기 학과를 노리는 이들이 생길 것이고, 그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은 이공계 비인기 학과를 선택할 것이다. 인문계로 진로를 바꾸는 선택은 그보다 더 후순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상위권 수험생 중 처음부터 문과를 지망하는 학생은 지금보다 큰 폭으로 감소하게 된다.
같은 과정을 거쳐 비슷한 공부를 한 다수의 학생을 사회로 내보내는 교육 시스템은 효율성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우리 사회 발전의 큰 원동력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인구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줄어드는 나라에서 모든 수험생의 목표가 같아지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을 낳게 될 수도 있다.
정승훈 디지털뉴스센터장 shju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홍라희·이부진·이서현 지분 2.7조원치 ‘블록딜’ 매각
- ‘집단 성폭행’ 최종훈, 日 팬커뮤니티 개설…구독료 4500원
- ‘지하철 서핑’ 10대 또 추락사…목숨 건 ‘좋아요’에 美 발칵
- “할아버지 폭행범 참교육했습니다”… ‘좋아요’ 19만개
- “어찌 생살을”… 강아지 인식칩 파내 두 번 버린 견주
- ‘음주’ 그랜저 충돌에 모닝 날벼락… 20대 아들 사망
- 사흘 굶고 “국밥 한그릇만”…글 올리자 벌어진 일 [아살세]
- “현근택 불출마 원치 않는다” 합의?…피해자 “또 당했다”
- “김정은, 전쟁 결심한 듯” 美 전문가의 살벌한 경고
- 월 최대 165만원 받는 병장… “금융교육 좀” 한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