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헌법이 위협받던 순간, 지도자들은 어디 있었나
영화 ‘서울의 봄’이 소환한 5·16과 12·12
특히 역사적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마치 당시의 상황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영화 ‘남한산성’이나 ‘사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그랬고, 재작년에 개봉되었던 ‘올빼미’나 지난해 방영됐던 드라마 ‘연인’ 역시 일반인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 큰 관심으로 다가왔다. 역사학자보다 감독과 작가들이 역사의 대중화에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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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만 군 병력 0.5% 3400명 동원해 성공시켰던 5·16 쿠데타
총리는 숨고, 대통령·육참총장은 애매한 태도…미국은 관망
12·12 때도 국방장관 피신…쿠데타 규정했던 미국 입장 바꿔
헌법·민주주의 지킬 의무 방기한 지도자들, 국민이 지켜봐야
」
그중에서도 영화 ‘서울의 봄’은 현대사 연구자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3차례에 걸쳐 헌정질서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5·16 군사정변과 유신, 그리고 12·12 군사반란이었다. 국회가 해산되었고, 헌법에 없는 기구 또는 비상국무회의가 입법기관의 역할을 대행하면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다.
헌정이 중단되었던 순간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국가에서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사실 이런 비상사태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군 통수권자가 스스로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유신을 제외한다면, 성공한 원인에서부터 성공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된 결과 등 모든 부분에서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5·16은 3400명의 군인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60만이 넘었다. 전체 한국군의 0.5%밖에 되지 않는 군인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만약 총리,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중 1인이 1개 육군 사단만 동원했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했을까?
‘서울의 봄’은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한 철 지난 논쟁을 소환했다. 성공의 원인이 미국이었는지, 아니면 한국 정부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미국의 책임은 주한미군사령관의 권한으로부터 나온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인사권에도 개입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개입해도 개입이고, 개입하지 않아도 개입이 되는 권한을 가진 것이었다.
5·16 성공, 미국의 책임인가
쿠데타군은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움직였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를 원대 복귀시킬 권한도, 진압할 수 있는 군대의 동원권도 갖고 있었다.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시점에서 주한미군사령관과 군사정부 사이에서 작전통제권 이탈에 대한 갈등이 발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울러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당시 미국의 정책이 바뀌고 있었다는 점이다. 1961년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동맹국 중 개발도상국에서 정치지도자의 개편을 모색했다. 기존의 정치세력들로서는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모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이었다. 1950년대를 통해 가장 큰 규모의 미국 원조를 받았던 한국에서 미국은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케네디 행정부에서는 봉건적이고 부패한 지도자들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젊은 군인들과 기술 관료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부각되었다. 한국에 대한 정책을 바꾸기 위한 팀이 구성되었고, 여기에서도 한국의 지도층을 개편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와중에 군사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
“내가 5·16을 승인받도록 했다”
공개된 미국의 자료를 보면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지만, 헌정질서가 무너지고 군부가 불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상황을 미국이 관망했던 데에는 이러한 새로운 정책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 새로운 정책을 만들었던 인물의 하나였던 로스토우(Walt W Rostow)는 자신이 5·16 쿠데타가 승인받도록 하는 1등 공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당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에 더 주목하는 입장도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군사정변이 발생하자마자 이를 반대하고 헌정질서의 회복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1군 사령부를 동원해서 군사정변을 진압하고자 하는 의지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의지는 두 가지 이유로 실행되지 못했다.
하나는 워싱턴의 태도였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미군 내의 상부 기구, 그리고 미국의 군 통수권자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 현지의 상황을 관망할 것을 지시했다. 다른 하나는 합법적으로 수립된 한국 정부 지도자들의 태도였다.
사라진 총리와 국방부 장관
미국은 이미 1959년 쿠바 혁명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었다. 내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앞마당에서 반미 혁명이 일어났다. 영화 ‘대부’ 2편에서 이 장면이 생생하게 나온다. 혁명 이후에도 좌파 정부가 내부의 지지를 얻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오판 속에 반혁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피그만 사건도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무조건 개입하기보다는 동맹국 내부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 지도층의 태도는 워싱턴과 주한미군사령관의 정책을 좌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총리는 군인들이 무서워 사라졌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북한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의 가장 큰 무기는 합법성과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면서 5·16이 정권 교체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육군참모총장은 쿠데타 편에 섰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는 더 이상 쿠데타 진압을 위해 한국군을 동원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졌다. 워싱턴에서의 결정도 그렇지만, 한국 내부 지도자들의 태도는 오히려 군사정부를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화와는 다른 현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울의 봄’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주한미국대사와 무서워서 숨은 한국의 국방부 장관이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1996년에 공개된 12·12부터 1980년 광주항쟁까지의 미국 문서를 보면 12·12 당시 한미연합사 벙커에는 주한미국대사, 주한미군사령관과 한국의 국방부 장관, 합동참모본부 의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함께 있었다. 한국군을 움직일 수 있는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개된 문서를 보면 5·16과 마찬가지로 12·12 때에도 미국은 관망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군사정변과 반란을 주도한 군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떻게 합법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였다. 5·16 직후에는 총리와 내각이 사퇴하고 의회가 해산되었지만, 윤보선 대통령을 계속 유임시킴으로써 헌법질서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12·12 때에는 최규하 권한대행이 계속 대통령의 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주한미국 대사는 처음에는 12·12를 ‘실질적인 쿠데타’라고 규정하였지만, 이틀이 지난 후 입장을 바꾸었다. ‘미국은 12·12가 신군부의 계획된 행동이 아니며, 쿠데타를 기도한 행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5·16과 12·12의 가장 큰 차이
이를 위해서는 최규하를 계속 대통령직에 두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의 문서 속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지지가 단절되고 신군부에 대한 의존이 심화한 상황을 활용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할 의사’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그 이후부터 1980년 5월까지 6개월간 긴 시간의 군사정변이 진행되었다. 어쩌면 하룻밤에 결론이 내려진 5·16과 6개월의 시간이 걸린 12·12 사이의 시간적 차이가 둘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였는지도 모른다.
‘서울의 봄’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도록 한다. 지도자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 국무위원들은 지도자가 임명하지만,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지도자가 임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켜야 할 대상은 국민이고, 민주주의이고, 헌법이다.
사료 속에 나타나는 지도자들은 국민도, 민주주의도, 헌법도 지키지 못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이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무 방기다. 국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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