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책의 운명

2024. 1. 1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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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서재의 책이 서고 눕더니 이제 걸어서 거실까지 나가버렸다. 읽는 속도보다 더 빨리 책이 온다. 이사를 할 때면 책 때문에 매번 수고비를 얹어야 했다. 정기적으로 책을 기부해도 내보내지 않는 책이 있으니, 저자의 서명본이다. 행여 두 사람의 이름을 친필로 적은 책이 헌책방을 떠돌 생각을 하면 우울했다. 어떤 책은 저자가 서명란에 정성껏 사군자를 치니 미술품에 가깝다. 그렇게 쌓인 책이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 인간의 서사처럼 책도 역사 있어
책의 물성 품격도 내용만큼 중요
작가품 떠난 책은 자체가 유기체

김지윤 기자

얼마 전 어떤 작가가 자신의 서재를 공개해서 책을 판매했다. 저자의 친필이 있는 책을 정가보다 가격을 올렸는데 시끄러웠다. 비록 책을 내보내지만, 저자 서명의 희귀성이 있으니 취득자가 잘 보관할 거라는 생각과 자신에게 기증한 책을 어떻게 팔 수 있느냐는 비난이 부딪혔다. 서명한 책장을 찢어서 판매해야 했다는 의견도 있었고 끝까지 소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 일은 한동안 지인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을 불렀다. 자신이 서명한 책이 헌책방에 팔리는 게 가슴 아프다는 작가와 서점에서 판매한 것도 아니고 선물한 책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작가도 있었다. 언젠가 헌책방에서 책을 구매한 이가 친필 서명을 사진으로 공개한 적이 있었다. 저자가 모 정치인에게 선물한 책이었는데 이 일로 정치인은 사과문까지 올렸다. 정작 기증한 작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불쾌하다거나 괜찮다는 표명도 하지 않았다.

나의 지인은 헌책 방에서 친필이 있는 소설가 이제하의 단편집 『기차, 기선, 바다, 하늘』을 구매했다. 1978년에 발간된 책을 기증받은 이는 문학계의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일별한 적이 있었다. 지인은 이제하 선생이 운영하는 혜화동의 카페를 찾아가 서명을 부탁했다. 선생은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친필이 있는 앞날개를 넘겨 다시 사인을 했다. 이 책이 왜 당신에게 있는지 묻지도 않았고 책장을 찢지도 않았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책도 사람처럼 운명이 있다. 인간에게 자기만의 서사가 있듯 책도 자신의 역사가 있다. 누군가의 서명과 여백에 깨알같이 쓴 글은 책이 살아온 시간이 아니겠는가. 헌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경건해질 때가 있다. 책을 소장했던 이의 품격이 느껴지는 경우다. 호주에 사는 나의 지인이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내게 보낸 적이 있다. 1906년산, 독일에서 발간된 중세의 영시집이었다. 책의 옛 주인은 독일에서 호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그는 영어 고문(古文)에 상당한 지식이 있고 책을 사랑한 남자로 생각된다. 스코틀랜드 고어(古語) 위에 연필로 쓴 독일어는 딱 한 번이었다. 책갈피에 옛 주인이 노트를 찢어 독일어 필기체로 메모한 종이가 있었다. 가로줄 위에 느낌을 적었는데 그가 붙들린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시간과 공간은 달랐지만, 그와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품을 정리하던 후손에 의해 헌책방에 보내진 것 같았다. 독일에서 호주로 또 바다를 건너 한국에 사는 내게 온 것도 책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예우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책의 뒷날개에 연필로 쓰인 그의 이름 아래 나도 연필로 두 번째 주인인 내 이름을 썼다. 먼 훗날 세 번째 책의 임자가 우리의 흔적을 발견하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우리가 이 책을 아꼈던 것처럼 그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독일에서 발간된 책은 백여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상태가 깨끗했다. 훼손되거나 변질되었다면 지인이 내게 선물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물성으로서의 품격도 중요하다. 어린 시절 부자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금박 장정 화려한 전집이 거실을 빛냈다. 장식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펼쳐보면 제본 과정의 엉성한 절수로 책갈피가 붙어있거나 활자가 뒤집혀 있기도 했다.

책은 읽고 싶은 독서욕과 함께 갖고 싶은 욕망을 부르는 물성을 갖추어야 한다. 왜 옛 사람들이 책의 장정에 노력을 기울였겠는가. ‘디지털 시대’의 전자책이 대세라고 해도 종이책이 갖는 품격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서점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디자인과 편집이 뛰어난 책이다. 좋은 내용과 반영구의 지질이라면 그 책은 소장본이 된다. 책방 나들이는 어떤 저자의 책을 사겠다는 목적으로 가서 좋은 책을 함께 집으로 들이는 것이다.

내게 온 저자의 서명 책들은 세월과 함께 변색한 것도 있다. 헌책방에서 구매한 초판이나 절판된 책은 전 주인들의 볼펜 글씨도 품고 있다. 처음엔 이마를 찌푸렸지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인간처럼 책도 그렇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품을 떠난 책은 유기체가 된다. 장성한 자식이 좋은 인연을 만나 순탄한 삶을 살기 바라는 부모처럼 작가도 그런 마음이었으면 한다.

자신의 서명을 품은 책이 여기저기 전전해도 그것이 책의 운명임을 초연히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하던 책도 그리고 나의 책도 먼 훗날 헌책방을 떠돌게 될 것이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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