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 동안 긴 꿈을 꾸었다... 부디 행복하길 [양민영의 한 솔로]
[양민영 기자]
▲ 페미니스트로서 인터넷 매체에 글을 싣는 일은 쉽지 않았다. |
ⓒ 픽셀스 |
그러나 운에 한해서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두드러지게 운이 좋은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불운한 사람도 아니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은 좋은 기회와 제안이 이어졌다. <오마이뉴스>에서 일 년 육 개월가량 선보인 '양민영의 한 솔로'도 그중 하나였다.
과분한 기회였으나 페미니스트로서 인터넷 매체에 글을 싣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혐오에 관해서 알지 못했던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과거 '운동하는 여자'를 연재할 때만 해도 화난 악플러들의 반응 앞에서 내 행동을 검열했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불분명하지 않았는지, 문장을 간결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지 않았는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건 아닌지, 수시로 돌아봤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는 분노와 혐오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알았다.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여성이라는 성별이 모든 잘못을 압도한다. 지금까지 쓴 글이 무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서툴고 논점이 엇나간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원죄는 역시 성별이다. 다음은 뭘까? 아마도 페미니스트가 쓴 편향된 글 따위를 싣는 언론사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어느 무명작가의 특수한 경험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간에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능력이 없어도 비난받고 능력이 뛰어나도 비난받는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팽개치면 당연히 비난받고 그 일에 성실하게 복무해도 비난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비혼으로 살아도 비난받고 아이를 낳아 길러도 비난받는 건 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벽에 이르면, 혹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기준에 도달하면, 대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일찌감치 접어야 한다. 여성인 이상 아무리 사고와 언행을 교정해도 우리는 혐오의 도마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행복
연재를 마무리하는 소회로는 너무 비관적인가? 물론 시작은 이렇지 않았다. 아직도 1화에 썼던 문장을 기억한다. '비좁고 소심한 삶에서 탈피해서 어린 시절에 꾸던 꿈의 파편이라도 손에 쥐고 싶다.' 호기롭게 선언했던 게 무색하게 전보다 더 비좁고 소심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마감을 회피하고 심지어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떨치지 못하는, 40화나 쓴 사람이 내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40화 쓰기'가 할 일 목록에 머물러 있었던 날이 자그마치 보름이었다. 영원히 끝낼 수 없는 숙제가 보험금 청구와 생필품 쇼핑 사이에서 홀로 굳건했다. 5킬로미터 달리기, 연하장 쓰기, 세면대 청소하기가 목록에서 차례대로 지워지는 동안 오직 초고 쓰기만 그대로였다. 발광하는 모니터의 하얀 공백을 응시하다가 몇 번이나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난 못해. 할 수 없어.'
그러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다가 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갑자기 삶의 주요한 사건이 죄다 불운으로 둔갑했다. 따지고 보면 태어난 것 자체가 불운이다. 그보다 훨씬 더 불운한 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이 불운한 일이다. 새 글이 공개될 때마다 악플러가 가장 먼저 반응하고 안팎의 여러 사정으로 부침을 겪으며 연재를 제때 마무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그래서 끝내 글쓰기가 불운한 일이라고 일갈하고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하면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글쓰기는 불운한 동시에 행복한 일이다. 어떤 비난, 악플, 검열도 역부족이다. 무엇을 써도 비난이 예상되는 상황이 오히려 나를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희박하고 드문 행복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재미다. 연재를 이어가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또 깊게 재미에 몰두했다. 셰익스피어는 틀렸다.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재미있느냐, 재미없느냐가 문제다. 어느새 재미는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이 됐다.
책, 친구, 대화 상대는 물론 시간을 때울 방법을 선택할 때도 오직 재미만 따졌다. 재미없는 이야기, 재미없는 삶, 재미없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서 연민을 느꼈다. 세상에, 다른 것도 아니고 재미가 없다니…. 남들은 나를 두고 오죽 재미있는 게 없었으면 글쓰기가 재미있느냐고 동정하겠지만 말이다.
▲ 응원과 격려를 보내준 이들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서 빈다. 부디 행운이 가득하길! |
ⓒ 픽셀스 |
동시에 재미의 비극도 깨우쳤다. 재미는 재미있으려고 애쓰는 순간 멀찌감치 달아난다. 굳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설파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돈을 갈구하면 돈은 멀어지고 어떤 사람을 너무 원하면 그 사람은 싸늘해진다. 재미도 그렇다.
한없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자유롭고 가볍게 날리다가 한순간 휘발돼 사라지는,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는 우리 삶의 정수를 어떻게 포착하고 전달할 것인가?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24시간을 다 바쳐도 부족한데 일상은 공과금과 온갖 구차하고 성가신 연락과 떠올리기 싫은 과거와 매달 겪는 생리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무미한 하루가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 삶 속에서 눈에 불을 켜고 어디 한 군데가 모자란 사람처럼 재미를 찾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 나에게는 그것이 크고 작은 불운을 이겨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방향은 언제나 작은 불운에서 큰 불운으로 향한다. 끔찍하도록 일상적인 하루에서 글의 소재를 찾고 불운한 동시에 행복한 글쓰기로 태어났다는 불운을 극복한다. 그러다 보면 여성이라는 압도적인 불운의 한 귀퉁이도 깨부술 수 있지 않을까.
'한 솔로'는 여기서 끝난다. 소설가 줌파 라히리의 말에 의하면 책을 쓰는 과정은 꿈을 꾸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 년 하고도 반년쯤 되는, 긴 꿈을 꾼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의 꿈 이야기만큼 지루한 게 없는데 매번 응원과 격려를 보내준 이들이 있다.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서 빈다. 부디 행운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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