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한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애도로 시작한 천대엽 취임사
“지난주 철두철미한 업무처리로 정평이 난 판사 한 명이 과로 속에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15일 취임사를 지난 11일 48세 나이로 숨진 고(故) 강상욱(33기) 서울고법 판사에 대한 애도로 시작했다.
모두 12쪽 분량의 그의 취임사엔 잇단 법관들의 과로사와 대거 사직 문제, 그에 따른 재판 지연에 관한 조희대 대법원장 체제의 법원의 고민과 해결책이 망라됐다. “재판을 위한 인적기반 마련에 필수적인 법관 증원, 젊고 유능한 법관 충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게 대표적이다. 전임 김명수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 축소 등 ‘사법행정권 포기’ 작업에 대한 조희대 사법행정 개혁의 청사진도 담겼다.
천 처장은 “지난 수년간 사법행정의 비중을 축소하고 권한을 분산하는 노력으로 여러 성과를 거두었다”면서도 “이제 국민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사법부를 구현하기 위한 사법행정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검토와 실천을 해 나갈 시점”이라고 말했다.
조 대법원장과 마찬가지로 ‘재판 지연 해소’를 “당면한 사법의 과제”로 꼽았다. “신속·공정한 재판을 통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은 사법부의 소명”이라고 하면서다.
그러면서 “사실심(2심)의 최종 심판자인 고법 판사들이 건강·육아 등 여러 원인으로 대거 사직을 반복하는 현상은 사실심의 안정적 운영을 어렵게 하고, 법관과 직원들의 잦은 사무분담 변경은 사법부의 전문성을 약화하고 재판 지연을 초래한다”고 원인을 진단했다. 실제 서울고법에서만 올 2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10여명의 판사가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천 처장은 이날 재판 지연의 해법으로 “국민에게 도움되는 연속성 있는 재판을 위해 한 법원에선 가급적 한 재판부에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인사 및 사무분담 원칙이 정립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중앙일보가 보도한 재판장 임기 2→3년 연장 방침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수 제한 등 지방법원 법관의 고등법원 진입 장벽을 낮추고 불필요한 전보 등 인사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쟁점이 까다롭거나 대형 사건이 몰리는 ‘형사부 기피’ 등 법원 문화의 변화도 짚었다. “합의부와 형사부 기피 현상, 구성원 간 경험의 공유를 위해 필수적인 소통과 토론의 감소, 과로로 인한 사직 등 어느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라고 하면서다.
형사부 기피와 관련해선 “비선호 보직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법관 및 직원에 합당한 처우가 이뤄지도록 각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등과 함께 배려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오랜 경륜과 경험을 갖춘 법관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제도 도입, 재판연구관 증원 및 법원 공무원의 역할 확대도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는 최근 사법전산시스템 마비로 인한 재판 중단 사태를 언급하면서 “국민 신뢰를 상실케 하는 적신호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면서 “재판과 민원업무의 인공지능 활용 등 사법전산시스템 고도화를 통해 재판 지연을 해소할 수 있는 창의적 방안도 도입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천 처장은 끝으로 예산과 법관 증원에 있어 국회의 협조도 호소했다. “재판 지연 해소는 사법부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재판 지연의 해소와 대국민 사법서비스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선 입법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고 하면서다. “삼권분립의 한축인 사법부 예산이 국가 전체 예산의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비율마저 감소하고 있다”고도 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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