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무너뜨린 이병헌, 악역에도 빛났다

양형석 2024. 1. 1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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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인기 완구 원작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

[양형석 기자]

1980~1990년대 미취학 아동이었거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었던 한국 남자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주변 어른들로부터 "남자는 밖에서 씩씩하게 뛰어 놀아야 한다"고 배우면서 자랐다. 실제로 인형놀이나 공기놀이 등 방안에서 아기자기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여자아이들을 위한 놀이들이 많았고 남자 아이들은 동네 놀이터나 골목, 운동장 등에서 또래 친구들과 몸을 부딪혀 가며 하는 놀이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지난 1964년 미국의 완구회사 해즈브로에서는 '인형놀이는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남자들을 위한 완구를 만들었다. 미국의 보병대가 사악한 코브라군단과 맞서 싸운다는 세계관을 가진 완구 '지 아이 조'였다. 발매와 함께 미국 현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지 아이 조'는 1980~1990년대 '지 아이 유격대'라는 이름으로 국내에도 수입돼 한국에서도 남자 아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완구에 이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지 아이 조'는 남자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밀리터리 상품을 좋아하는 일부 어른들에게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지 아이 조'는 무려 1억 7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해 처음으로 실사영화를 만들었다. 한국배우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국내에서 더욱 화제가 됐던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아래 <지.아이.조>)이었다.
 
 <지.아이.조>는 한국배우 이병헌의 출연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 CJ ENM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한국배우

지난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지상만가>에서 이병헌은 세계적인 스타를 꿈꾸는 3류배우 종만을 연기한 바 있다. 당시 이병헌은 영화 속 종만처럼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런어웨이> <그들만의 세상> 등 출연하는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며 과도기를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병헌이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될 거라는 상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병헌은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한국배우가 됐다.

이병헌은 <달콤한 인생>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 등에 출연하며 충무로에서 입지를 다지던 2000년대 후반 <지.아이.조> 실사영화에 캐스팅됐다. 당시 이병헌의 소속사에서는 <지.아이.조> 캐스팅을 위해 스티븐 소머즈 감독에게 이병헌이 지금까지 찍었던 작품들의 영상을 모두 보냈다. 하지만 정작 이병헌 캐스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영상은 국내 대중들에게 '건치댄스 짤'로 유명한 일본 도쿄돔 팬미팅 영상이었다고 한다.

<지.아이.조>에서 코브라의 멤버 스톰 쉐도우를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병헌은 2013년 <지.아이.조2>와 <레드: 더 레전드>에 출연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전설의 액션배우 브루스 윌리스와 두 작품을 함께 찍었는데 브루스 윌리스가 이병헌을 많이 챙겨주면서 두 스타는 돈독한 사이가 됐다. 2015년에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국내 관객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악역 캐릭터 T-1000을 연기했다.

이병헌은 국내에서도 최고의 배우지만 할리우드에서도 희소가치가 있는 동양 배우다. 좀처럼 보기 드문 동양계 누아르 액션 배우에 어설프게 혀를 굴리지 않으면서도 또박또박 대사를 전달할 수 있는 영어 구사력도 매우 준수한 편이다. 제작사나 감독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춘 동양계 배우다.

하지만 이병헌은 할리우드 활동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이병헌은 2016년 알 파치노, 안소니 홉킨스와 법정 스릴러 <미스컨덕트>, 덴젤 워싱턴, 크리스 프랫, 에단 호크와 웨스턴 액션 <매그니피센트7>에 출연한 후 할리우드에서의 작품활동을 사실상 마감했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병헌은 <남한산성> <그것만이 내 세상> <남산의 부장들>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에서 열연을 펼치며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에펠탑을 무너뜨리는 이병헌의 화려한 액션
 
 스톰 쉐도우 역의 이병헌(오른쪽)은 2013년 개봉한 <지.아이.조2>에서 주연급으로 비중이 대폭 늘었다.
ⓒ CJ ENM
 
 <지.아이.조> 실사영화는 2008년 마블에서 <아이언맨>을 비롯한 히어로 영화들을 하나씩 선보이며 블록버스터 액션시장을 선점하자 2009년 여름 시장을 목표로 제작된 작품이다. 1억 7500만 달러에 달하는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지.아이.조>는 세계적으로 3억 2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극장수입만으론 살짝 아쉬웠지만 영화개봉과 함께 관련 제품의 판매가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사실 <지.아이.조>는 많은 제작비에 비해 CG나 특수효과의 완성도는 다소 촌스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는 제작사와 스티븐 소머즈 감독이 의도한 부분이 컸는데 완구제품이 원작인 만큼 일부러 게임화면이나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연출을 한 것이다. 다소 만화적인 연출 속에서도 영화 중반 듀크(채닝 테이텀 분)와 립코드(마론 웨이언스 분)가 강화수트를 입고 파리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은 상당히 멋지다.

이병헌의 출연으로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던 <지.아이.조>는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해 전국 2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실제로 이병헌이 연기한 스톰 쉐도우는 악역이었음에도 영화 속에서 가장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며 세계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지.아이.조 멤버들의 방해(?)를 뚫고 파리의 랜드마크 에펠탑을 쓰러트리는 장면은 <지.아이.조>에서 가장 인상적인 액션장면이었다.

국내에서는 이병헌의 출연으로 화제도 됐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북미 현지에서는 2009년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6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특히 스톰 쉐도우를 비롯한 코브라 멤버들은 모두 개성이 강한 데 비해 정작 주인공인 지.아이.조 멤버들은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주인공 부대에서 가장 개성이 강했던 스네이크 아이즈(레이 파크 분)는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다.

1편에서 부가시장의 성적을 더해 흑자를 거둔 <지.아이.조>는 4년이 지난 2013년 존 추 감독이 연출한 속편이 개봉했다. 드웨인 존슨과 브루스 윌리스가 가세했고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의 비중이 커지면서 이병헌도 주연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분량이 늘어났다. <지.아이.조2>는 원작과 전편의 캐릭터들이 대폭 물갈이되면서 원작팬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3억 7500만 달러의 성적으로 흥행에서는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

빌런으로 등장해 히로인으로 마무리
 
 로맨스 배우로 이름을 알렸던 시에나 밀러는 <지.아이.조>를 통해 여전사로 변신을 시도했다.
ⓒ CJ ENM
 
118분의 런닝 타임 중 반 이상이 때리고 부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는 화끈한 액션영화 <지.아이.조>에는 액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배우도 한 명 출연했다. 바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500일의 썸머>를 통해 이름을 알린 조셉 고든레빗이었다. 고든레빗이 연기한 코브라 커맨더는 1편에서 반전의 키를 쥐고 있고 2편에서는 실질적인 메인빌런으로 활약하지만 고든레빗은 1편을 끝으로 <지.아이.조>에서 하차했다.

2004년 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로 스타덤에 오른 후 2000년대 국내에서 '패션아이콘'으로 인기를 끌었던 시에나 밀러는 <지.아이.조>에서 듀크의 전 여자친구이자 코브라의 여성전투요원 배로니스 역을 맡았다. 영화 속 대사에 의하면 스톰 쉐도우에게 전투를 배운 듯한데 스톰 쉐도우는 남편인 다니엘 남작이 배로니스에게 키스를 하자 남작을 살해해 버린다. 하지만 배로니스는 스톰 쉐도우의 순정도 몰라주고 옛 연인 듀크에게 돌아간다.

<지.아이.조> 부대를 이끄는 호크 장군 역은 <애니 기븐 선데이> <파 프롬 헤븐> <투모로우>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데니스 퀘이드가 맡았다. 듀크에게 지.아이.조 부대 합격소식을 전하고 신무기 나노마이트가 들어 있는 가방을 보관하지만 스톰 쉐도우와 배로니스의 습격을 막지 못하고 나노마이트를 빼앗긴다. 호크 장군은 스톰 쉐도우의 검에 가슴을 베이며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금방 깨어나 부대원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강인한 지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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