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 들어온 그 환자, 정말 외계인이었을까
[김성호 기자]
정신병동은 많은 창작자가 애호하는 주제다. 파울로 코엘류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 같은 작품은 세계적 명성을 얻기까지 했다. 이밖에도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정신병동 만큼 일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캐릭터가 한 데 모여 있는 공간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설과 영화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설정, 즉 인간의 의지와 현실의 장벽이 마주 닿아 끊임없이 대립하는 이야기를 써내기도 좋은 환경인 것이다. 제도와 기술로 인간의 의지와 개성을 억압하는 일이 자연스레 펼쳐지며, 동시에 그를 극복하여 정상성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 케이 펙스 포스터 |
ⓒ 유니버설 픽쳐스 |
인간 이해 밖의 문제가 닥쳐올 때
<케이 펙스>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문제를 다룬다. 평생을 과학의 영역에서, 또 인간 내면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보내온 정신과 전문의 마크 포웰(제프 브리지스 분) 앞에 한 환자(케빈 스페이시 분)가 나타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환자의 이름은 프롯, 그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고 주장한다. 지구에서 1000광년이나 떨어진 행성 케이-펙스에서 시간과 공간을 건너 여행을 왔다며,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지구 방문이라고 말한다.
누가 보아도 인간의 외양을 지닌 프롯이다. 경찰로부터 정신병동으로 인계된 그가 아무리 저를 외계인이라고 주장한대도 그 말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하다. 마크는 그가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고 여기며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만 프롯의 진지하고 점잖은 태도에 조금씩 호감을 품게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프롯은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고, 다른 질환자들 사이에서 일상을 보낸다. 이곳엔 강박부터 조현병, 온갖 정신질환을 겪는 이들로 가득하다. 벌써 십 수 년 째 좁은 공간에서 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 건물 바깥엔 온갖 유해물질이 있어 위험하다며 실내에 있기를 고집하는 남자,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제 안으로만 침잠하는 여자 등 그야말로 온갖 질환자가 한 가득이다. 그 가운데서 보낸 몇 주 만에 프롯은 그들에게 특별한 신뢰를 받고, 그들이 겪는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 케이 펙스 스틸컷 |
ⓒ 유니버설 픽쳐스 |
스스로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
그러나 모든 이가 프롯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다. 특히 의사들은 프롯이 환자에게 헛된 희망과 잘못된 치료법을 주입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 호감을 가진 담당의 마크조차도 말이다. 마크는 프롯이 망상증 환자라고 굳게 믿으며 그를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프롯에게 관심을 기울일수록 그를 그저 환자로만 취급할 수 없음을 마크는 깨닫는다. 프롯이 증언하는 수많은 사실들이 현재의 인류로선 닿을 수 없는 지식임을 은연 중에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가까이 지내는 천문학자에게 프롯이 한 말들을 옮기고, 그로부터 프롯이 현재 과학을 넘어서는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는 지식을 아는 존재, 그러나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는 그를 어떻게 취급해야할지 마크는 혼란에 빠진다. 그 가운데 프롯은 얼마 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임을 알린다.
▲ 케이 펙스 스틸컷 |
ⓒ 유니버설 픽쳐스 |
첨단 기술 없이도 SF가 가능하다는 걸
<케이 펙스>는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어느 의사의 성장드라마인 한 편으로, 저 멀리 외계에서 온 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SF영화이기도 하다. 정신병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저기 그린란드부터 북방의 여러 나라를 순식간에 오갔다고 주장하는 프롯의 행보가 당혹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이어진다.
SF가 꼭 거대한 우주선과 낯선 외계 행성, 첨단 기술력이 집결된 기계들 속에서 쓰일 필요가 없다는 걸, 인간에게 과학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충분한 극적 재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내보인다.
▲ 케이 펙스 스틸컷 |
ⓒ 유니버설 픽쳐스 |
우주를, 인간 내면을 돌아보도록 이끈다
흥미로운 건 사회도, 또 의사들도 프롯만큼 그들을 마음 다해 대하고 바라본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돌이켜보면 프롯조차 경찰과 의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누구도 제가 지닌 선입견을 넘어 프롯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에게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훨씬 약하고 어려운 이들이 정신병동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 같이 차갑고 엄격한 세상이 영화 속 미국뿐일까. 오늘의 한국에선 누구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외롭고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과연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약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삶이 펼쳐지는 세상이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선 안 되는 건 아닐까.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프롯의 관심이 다른 이들의 변화를 이끌었듯이, 굳어 열리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여는 일도 외로 이 같은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를 일이다.
정신병동이란 제한된 장소 안에서도 저 멀리 우주를 생각하게 하고, 인류가 이룩한 과학적 세계를 펼쳐 보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도록 이끄는 영화다. 화려하지도, 시종일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극적 재미에 치중하지도 않으면서도 관객의 마음 한켠에 짙고 진한 울림을 주는 영화를 만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거의 20년이 지난 영화, 심지어 어느덧 이야기하는 이 얼마 없는 작품이 된 이 영화가 그저 그렇게 잊혀져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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