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리스크 다시 '복병'…유가안정·수출에 찬물 끼얹나
홍해·호르무즈해협 전운으로 재부상
바닷길 막으며 對유럽 수출 걱정
확전 가능성 낮아 단기 요인 전망도
홍해·호르무즈해협에서 연달아 일어난 무력 충돌로 '중동 리스크'가 재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안정세를 찾으며 수입물가를 완화했던 국제유가가 다시 불안해지며 복병으로 떠오른 데다, 바닷길 차단으로 수출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기름값은 14주째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국제유가가 정부의 예상을 넘는 수준까지 상승할 경우 기름값이 오르는 것은 물론 가스·전기료 인상 압박이 커질 수 있어 물가 안정 기조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지난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 간 전쟁 발발에 이어 감산 이슈로 상승 압력을 받았던 국제유가는 이후 비OPEC(석유수출국기구) 국가들의 증산 결정 등으로 안정화 추세를 보였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새해 첫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금리 추가 인상 필요성이 줄어든 이유로 유가 상승을 부추기는 하마스 사태와 대외 경제의 불안 요인이 많이 완화된 점을 언급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예멘 반군 후티가 홍해를 지나는 상선을 공격하고 미국이 군사 대응으로 맞선 이후, 불안감은 계속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지난 12일 기준 미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장중 한때 4% 이상 상승하며 75달러 선을 넘기기도 했다. 윤재성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글로벌 LNG 물동량의 8%가 수에즈 운하(홍해의 관문)를 통과하기 때문"이라며 "이 같은 최근 지정학적 이슈는 유가뿐 아니라 글로벌 천연가스 가격의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영국 재무부는 이 여파로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달러 이상 상승하고, 천연가스 가격도 25%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컨설팅 회사인 라피단 에너지의 밥 맥낼리 대표는 배럴당 90달러까지 유가가 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주말 사이 미국·영국이 예멘 후티 반군을 추가 공격하며 정세가 더욱 긴장됐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이란 해군이 호르무즈해협에서 미국 유조선을 나포한 이후 벌어진 보복 작전 차원이다. 호르무즈해협은 주요 산유국의 해상진출로로, 우리나라 원유 수입의 70% 이상이 지나는 길목이다.
에너지 공급 관련 긴장감 고조에 산업통상자원부는 14일 급히 수급 상황 확인에 들어가기도 했다. 산업부는 이날 석유공사와 가스공사, 정유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상황점검 회의를 열고 석유·가스 비축 현황과 비상대응 매뉴얼을 점검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국내 원유와 LNG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차질은 없고, 중동을 지나는 우리 유조선·운반선은 모두 정상 운항 중이다.
당분간 유가는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에 민감한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심수빈 키움증권 투자전략팀 연구원은 "지난해 이란의 원유 생산·수출이 늘어나며 OPEC의 감산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줬는데, 관련 이슈가 이란 원유 공급에 변화를 줄 경우 원유시장 내 공급 불안은 재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주중 발표되는 OPEC과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월간 보고서를 통해 향후 원유시장 내 전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수출액 10% 차지한 對유럽 무역 '빨간불'
홍해는 전 세계 해상무역의 15%가 통과하는 곳이라, 국제유가 외에 우리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지난해 '효자'로 떠오른 대(對)유럽연합(EU) 수출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산업부에 따르면 작년 대EU 수출액은 약 683억달러(약 89조6000억원)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한국 연간 수출액의 1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한 바 있다. 다만 대부분 해운에 의존하는 자동차·기계가 주력품목이었던 만큼, 항행 위기 가능성이 부각되며 유럽 수출에 찬물이 끼얹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 파나마 운하의 수위가 가뭄 탓으로 낮아져 선박 통행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유럽·중동·아시아를 연결하는 홍해 항로가 제 기능을 못하면서 주요 해운사들은 홍해 운항을 중단하고 아프리카 대륙 남단으로 먼 길을 우회하고 있다. 이에 세계 해운운임 지표인 상하이컨테이너 운임지수(SCFI)는 지난 12일 기준 2206.03을 찍으며 전주 대비 16.3% 상승했다. 운송기간 연장에 물류비 부담까지 겹치면서 반등하던 수출에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단기 변동 요인 그칠 것…운송수지엔 외려 긍정적"
다만 일련의 충돌이 중동 내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작아 단기적 영향에 그칠 거라는 전망도 있다. 유승민 삼성증권 지정학분석팀장은 "2017년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핵합의(JCPOA) 탈퇴 이후 제재로 이란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현 정권의 내부 지지도 약해 대규모 전쟁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일련의 충돌이 중동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작다"고 분석했다.
전반적인 국제 환경을 고려했을 때 유가 상승이 체계적 위험을 촉발할 가능성 역시 크지 않아 보인다. 유 팀장은 "미국의 원유시장 점유율 확대 등 구조적 공급 증가와 글로벌 수요 부진이 더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는 지난주 WTI 가격이 75달러까지 올랐음에도 상승폭을 제한하며 72달러 후반대로 거래를 마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5일 오전 9시 20분 현재도 WTI는 72달러 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올해 석유에 대한 국제 수요 자체가 예년보다 많아진다고 보기 어렵고,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가 상당히 높아진 만큼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까지는 가기 어렵다"며 "100달러를 넘는 등 우려하는 수준만큼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수출의 경우에도 무역수지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고, 경상수지 차원에서는 운송수지에 오히려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현재 수출입 하는 데 지장이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운임이 높아지는 모습이 나타났는데 이는 운송수지 쪽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유진 기자 genie@asiae.co.kr
세종=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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