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지전설 수용한 실학자 홍대용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후기의 실학자들 중에 가장 독특한 인물이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라고 할 수 있다. 홍대용은 지동설이 조선에 유입되기 전에 이미 이를 받아들여 지전설을 주장하고 우주무한론을 주장하며 천문학과 자연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와 아울러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배척했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홍대용이 처음이었다.(이수광,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선비들>)
홍대용(1731~1783)은 충청도 청원군 수신면 장수리에서 아버지 홍역과 어머니 청풍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김방의 딸이고, 아버지는 그가 14살일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문경현감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고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의문을 가졌다. 예의범절에는 구구절절한데 농사짓고 장사하는 내용은 없다는 의문이었다. 그러다보니 과거 공부보다 실용적인 학문.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면서 박지원·유득공·이덕무 등 실학자들과 널리 교분을 나누었다.
이와 같은 성향을 지켜 본 아버지가 전라도 나주 목사로 부임하여 그 지역의 숨은 과학자 나경적에게 아들을 소개시켰다. 29살의 젊어서의 일이다. "이 두사람의 만남이 한국 과학사에 귀중한 발자취를 남기는 초석이 되었으며, 이때 나경적의 나이가 일흔 살이 넘었다고 했다. 그의 방 책상 위에는 자명종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데 어김이 없었다고 하며, 이로써 또한 서구의 과학지식을 탐구하여 이 기계를 완성한 노 선생의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시켜준다."(김태준, <홍대용>)
홍대용은 세속의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이른바 '잡학'이라는 과학에 빠져들었다. 30살이 되는 1760년 스승(나경적)을 아버지가 일하는 아문으로 모셔다가 자명종과 천문시계 혼천의(渾天儀) 등의 제작에 들어갔다. 이듬해 혼천의가 이루어졌으나 기계가 너무 크고 복잡하여 이를 다시 간단하고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1762년 두 대의 혼천의와 자명종이 완성되어 고향 마을에 옮겨 설치했다. 적지 않은 비용은 아버지가 댔다.
35살이 되는 1765년 서장관이 된 작은 아버지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갔다. 중국 연경은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현지에서 중화사상의 실체와 서양에서 받아들인 과학문명의 실상을 알아보고자 해서였다.
그는 연경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필담을 통해 그들의 학문을 알아보고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 천주교와 천문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을 수용했다.
이제 서양의 법을 산수로서 근본을 삼고 의기(儀器:천체기구)로써 창작하며 온갖 형상을 관측하므로, 무릇 천하의 멀고 가까움, 높고 깊음,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운 것들을 모두 눈앞에 집중시켜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하니, '한·당 이후 없던 것이라' 함은 망령된 말이 아니리라.(홍대용, <유포문답(劉鮑問答)>)
그는 실학과 과학을 연구하면서 당호를 담헌(湛軒)이라 지은 데 대해 "담 자가 허명(虛名)하고 소광(昭曠)하여 외물(外物)의 누가 없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것은 텅 비고 맑으며, 밝고 넓은 집으로, 숨은 선비의 뜻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향 청원군 수촌에 마련한 집과 이곳에 설치한 사설 천문대 농수각과 혼천의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준비해 가지고 간 <농수각과 혼천의 기사>를 소개하였다.(김태준, 앞의 책, 재인용)
가까이 지냈던 실학자 이덕무가 어느 날 연암 박지원과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연암 선생과 함께 남산 아래 선생 댁을 찾아갔다. 정갈한 방 안에 들어가니 벽에 비스듬히 세워 놓은 거문고와 들보 위의 서양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어지럽고 복잡한 천문도가 걸려 있어, 여느 선비의 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1774년 동궁인 정조의 시강이 되어 뒤늦게 관직에 나아갔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헌부감찰, 이듬해 태인현감, 1780년 연천군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시집 <해동시선>, 철학소설 <의산문답>과 수학책 <주해수용> 등을 저술하였다. <의산문답>의 한 대목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다.(…) <춘추(春秋)>는 주나라 책이니, 내외의 구분이 엄한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공자가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가 살았다면 중화(中華)로 이적(夷狄)을 변화시키고 주나라의 도를 주나라 밖에 일으키는 것이니, 마땅히 내외의 구분과 존양의 뜻을 갖춘 주나라 밖의 춘추가 있었을 것이다.
홍대용은 성리학 체제에서 벗어난 선비였다. 탐구하는 영역이 과학 분야였지만, 낡은 중화주의와 구조주의적인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합리적인 사고와 실행을 담보로 하는 순정한 학인이었다.
그의 글 '선비의 도'의 한 대목이다.
인의는 깊이 생각하고 예법을 조용히 행하여 천하의 부귀도 그의 뜻을 음탕하게 못 하고 누항의 곤궁함도 그의 악(樂)을 고치지 못하며, 천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친구로 삼지 못하며 출세하되 도를 행한다면 혜택이 사해에 펴지고, 벼슬을 않고 숨는다면 도를 천재에 밝힐 수 있는 자라야 내가 이른바 선비일 것이니, 이런 자야말로 참된 선비라 할 수 있는 것이다.(<홍백농에게 주는 설>, <국역 담헌서>)
관리보다 학인이었던 그는 1783년(53살) 어머니의 병을 핑게로 영천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 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하늘이 줄 보답을 믿으며, 하늘이 낸 벼슬인 선비의 길을 걸었던 그의 53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조선 선비의 한 모범을 보였고, 그는 자기의 학문으로 조선의 18세기를 동아시아 문화사의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8세기의 실학은 그가 지도한 북학파를 거치면서 조선의 18세기를 빛나는 세기로 발돋움하게 했다.(김태준,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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