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시간②] “의무는 강요되고 혜택은 없다”...기업 야성 빼앗은 사회
반도체 업계 “지난해 삼성 힘드니 협력사도 같이 힘들어”
“미래 번영 위한 책임, 국회·법원도 아닌 기업이 지는 것”
지난해 발표한 삼성전자의 경제가치분배액은 총 281조원. 국내 기업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일뿐더러 2021년에 비해 19.1% 증가한 수치다.
경제가치분배액은 대기업의 중소기업·가계에 대한 ‘낙수효과’를 의미하는데, 2022년 삼성전자는 220조원에 달하는 물품과 서비스를 구매했고 38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인건비를 지출했다.
특히 법인세 등 세금으로 13조원을, 사회공헌비로 4000억원을 쓴 삼성전자의 국민경제 기여도는 국가 전반에 걸친 압도적 영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윤 80% 사회 환원’이라는 공익적 기업관을 지키고 있는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이재용 회장의 삼성전자는 지금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고, 국민경제는 물론 공익사업 기여를 위한 그의 미래 구상에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기업은 국가와 국민을 기반으로 존립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사회 환원’이라는 막중한 의무를 가지지만, 더 이상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삼성의 숙제는 아직 그 밑그림 조차 그려나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수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기업 환경의 수준을 논하기에 앞서 이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 사건에 대한 1심 선고를 열흘 남짓 남겨놓은 시점에서, 지루하게 이어지는 삼성 사법리스크의 근본적 원인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마디로 거미줄 같은 규제와 엄격한 잣대를 꾸준히 들이밀며, 반대로 통 큰 사회 환원과 공익사업을 기대하는 국가 정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시점이라는 것이다.
박기순 덴톤스 리 법률사무소 상임고문은 “공익사업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시킬 수 있는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도 삼성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할 시기”라고 주장한다.
박 고문은 특히 올해 반도체 부문의 중요한 변곡점을 맞는 삼성전자에게는 이번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무엇보다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글로벌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에서 TSMC에 점유율이 크게 뒤지고 있는 삼성에게 끝없는 사법리스크가 없었다면 시장 진입 시기를 앞당겨 기술력 확보와 국가 경쟁력의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삼성의 사회공헌 확대는 물론, 반도체밖에 남지 않은 한국 경제의 대중무역 적자 시대 도래를 조금 더 늦추는 계기를 마련할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혁신으로 연결돼야 할 삼성의 이번 조직개편이 ‘무색무취’에 그쳤다는 비판도 그 원인은 광폭 행보를 이어가야 할 이 회장의 신체 구속에서 시작됐다는 해석도 있다.
이건희 선대 회장의 10년을 내다보는 안목을 기르고 장기 전략을 세울 리더십의 시간이 이 회장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란 것이다.
박 고문은 “사법리스크에 매달릴수록 삼성은 조직의 안정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변화 시대에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삼성의 ‘안정’이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깎아먹는 수순”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이 사법리스크에 시간을 쏟는 동안 반도체 업계에도 파랑이 일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300조원을 투자한다는 삼성의 계획이 원활이 진행될 수 있을지가 중견중소기업들이 포진한 반도체 업계의 최대 이슈였기 때문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지난해 반도체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감산 과정에서 생산에 필요한 소재를 공급하는 기업들이 타격을 받았고, 시설 투자 역시 반도체 경기와 맞물려 계획들이 늦춰진 면도 있다”고 전했다.
협회 관계자는 “신규 투자되는 팹 안에 세팅을 하는 장비 기업들도 대기를 해야 하는 등 삼성과 SK하이닉스가 힘드니 협력사들도 같이 힘들었던 시기였다”며 “삼성의 원활한 투자는 협력사들이 반도체 제조 시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주요 경쟁력이자, 낙수 효과를 통해 동반 성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좀 더 원론적으로 기업의 혁신과 기업가의 야성을 빼앗은 한국 사회에 대한 물음도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삼성이 사회에 뭘 할 수 있냐를 묻기 전에 사회가 삼성에 무엇을 해줬는지 물어볼 차례라는 것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를 만들어 놓고 지금 30년간 사회공헌에 노력해온 삼성에 또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기업들의 사회 환원 역할을 도외시하고 균형 감각을 잃은 국가 정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세력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삼성이 불법을 저지른게 있다면 책임을 지고 그동안 사회에 기여한 부분이 있으면 참작을 하면 되는 것”이라며 “삼성과 LG 같은 대표기업이 이룬 지금의 결과를 망각하고 삼성에 사회적인 윤리나 도덕적 책임을 과도하게 물리는 것이야말로 균형 감각을 잃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 경제는 이제 정점을 지났고 이제는 얼마나 천천히 내려가는가만 남은 상황에서 앞으로 10년, 20년 뒤에 지금 누리는 번영을 누릴 수 있을까를 먼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기업들에 죄를 물을 사법제도 역시 그동안 공정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래 한국의 번영을 책임질 사람은 국회나 법원도 아닌 기업이라는 절박감이 외면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순영 기자 binia96@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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