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대장船 ‘뱅가드’
신중한 투자 철학 반영해
비트코인 현물 ETF 거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맬번에 본사를 둔 세계 2위 자산운용사 뱅가드그룹은 고객의 거센 항의를 받고도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취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투자 철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국 뉴욕증시의 나스닥·아멕스 거래소에서 11개 자산운용사의 비트코인 현물 ETF가 상장된 지난 11일(현지시간) 뱅가드는 이런 성명을 냈다.
“뱅가드 플랫폼에서 고객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암호화폐 관련 상품을 제공할 계획은 없습니다. 이 상품은 우리의 투자 제안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식, 채권, 현금 같은 자산만을 균형 있는 장기 투자 포트폴리오의 구성 요소로 간주합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그 하루 전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과 거래를 승인하면서 ‘상장지수상품(ETP)’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ETP는 펀드(fund)의 일종인 ETF를 포괄하는 상품(product)의 개념이다. 비트코인이 SEC로부터 석유, 부동산, 곡물, 광물 같은 상품으로 인정된 셈이다. 하지만 뱅가드는 비트코인을 상품으로도 보지 않았다.
뱅가드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의 웬만한 상장사에서 1, 2대 주주 자리를 꿰찬 ‘패시브(수동형) 펀드’의 강자다. 1975년 뱅가드를 창립한 존 보글(2019년 사망)은 ‘인덱스 펀드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안전하고 꾸준하게 수익을 낸 보글을 “나와 미국 투자자의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뱅가드는 ‘영국 해군 영웅’ 허레이쇼 넬슨의 제독 시절 대장선의 이름이다. 함대에서 가장 먼저 진격하고, 위기에서 뱃머리를 함부로 돌릴 수 없는 대장선의 용기와 고민이 뱅가드의 기업명에 담겨 있다. 보글의 자서전 제목인 ‘경로를 유지하라(stay the course)’는 뱅가드의 투자 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다. 뱅가드의 신중한 투자 철학에 비트코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래도 자산운용사라면 돈을 맡긴 고객을 설득해야 한다. 세계 최대 증권시장인 뉴욕증시에 비트코인을 놓고 큰 장이 열렸는데, 원칙을 운운하는 뱅가드의 방어적 태도는 고객의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미국 SNS에서 지난 주말 내내 ‘뱅가드 거부(#BoycottVanguard)’ 해시태그가 물밀듯이 쏟아졌고 “내 401K를 빼겠다”는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401K’는 미국의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 401조 K항에 규정된 기업연금제도, 즉 은퇴연금을 말한다. 뱅가드의 운용자산 7조7000억 달러(약 1경100조원) 가운데 상당수는 고객의 은퇴연금으로 누적됐다.
뱅가드가 머뭇거릴 때 세계 1위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성장주 투자의 거목’ 캐시 우드의 아크 인베스트먼트, SEC의 비트코인 현물 ETF 재심사 판결을 지난해 8월 미국 연방항소법원에서 받아낸 그레이스케일이 뉴욕증시에 판을 깔아놓고 돈을 쓸어 담았다.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 후 이틀간 거래액은 70억 달러를 넘겼다.
이 틈에 비트코인의 시가총액은 미국 자산시장 분석업체 컴퍼니스마켓캡 기준 8374억 달러(약 1100조원)로 불어났다. 뉴욕증시에서 10위권인 버크셔해서웨이(7914억 달러)와 테슬라(6958억 달러)의 시총을 훌쩍 넘었다.
이쯤 되면 비트코인 현물 ETF를 거래할 수 없는 한국의 주식 인구 1400만명 중 누군가는 뱅가드를 대장선으로 세운 함대에 합류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70억 달러 이상의 거래액을 기록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의 물량을 누군가는 팔았다는 얘기가 된다.
비트코인 현물 ETF는 지난주 뉴욕증시를 마감한 한국시간으로 13일 오전 6시 종가로 5~6%씩 급락했다. 개인투자자 중 상당수는 매물을 받아내며 손실을 봤을 것이다. 큰 변동성이 설익은 시장을 보여준다. 아직은 ‘뱅가드 함대’가 안전해 보인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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