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아동 빈곤 예방이 저출산 대책이다

2024. 1. 15.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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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빈곤 아동은 '포기'에 익숙해
가난 대물림되는 악순환 반복

가난한 가정 지원 강화해
계층간 사다리 복원한다면
결혼과 출산이 고소득층의
사치품 되지 않을 것

모든 아동에게 차별 없는
균등한 기회 보장해야

아동기의 가장 큰 위기는 빈곤과 학대다. 그중 빈곤은 단순한 물질적 결핍에 그치지 않는다. 가난하면 포기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고 했던가.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학원에 다니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 아동의 욕구는 먹고사는 시급한 문제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된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될수록 아동은 ‘포기’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고 역량을 개발할 기회들이 제한되면서 빈곤한 청년, 빈곤한 성인으로 성장해 다음 세대에까지 빈곤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빈곤은 출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난한 청년들은 빈곤의 대물림이 두려워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 임신이 위기의 첫 고리가 되어 아이를 낳으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뿐 아니라 아이의 행복과 미래마저 빼앗아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한다. 위기 가구에서 벌어지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접하면서 이런 공포는 더 커지는 듯하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가난하면 자식을 낳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최근의 언론 보도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빈곤 아동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빈곤한 부모와 함께 생활한다. 그런데도 빈곤 아동에 대한 지원은 상대적으로 관대하지만 빈곤한 부모에 대한 지원은 야박하고 폭력적인 경우가 많다. 빈곤 아동은 도와줘야 할 불쌍한 아이로 간주하지만 빈곤한 성인은 수급을 위해 소득을 속이거나 자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까다로운 수급 기준을 보면 정부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회적 낙인 때문에 일부 빈곤 가정은 수급 신청 자체를 포기한다. 빈곤은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 탓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기초생활보장을 포함한 복지는 국민의 최소한의 권리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이를 통해 수급 신청을 회피한 위기 가구들도 정부 지원 제도에 의지할 수 있다. 빈곤한 부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빈곤 아동들도 낙인감 없이 필요한 지원을 받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빈곤 아동에 대한 직접적 지원 역시 강화돼야 한다. 다양한 지원 대상 중 아동만큼 투자 대비 효과가 높고, 투자하지 않았을 때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높은 집단은 없다. 지금 지원받는 아동이 미래에 얼마나 훌륭한 성인이 될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아동 지원에는 몇 배의 세심함이 수반돼야 한다. 공급자 관점에서 좋은 일이 정작 아동에게는 큰 상처로 남게 될 수 있다.

20여년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생활한 청년의 책 ‘일인칭 가난’에 나오는 무상 우유 급식 사례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지원 형태다.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대상자를 호명하고 학생이 교무실에 가서 직접 우유를 받아들고 와야 하는 것은 배려 없는 방식이다. 현재는 무상 지원 대상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고 택배로 배송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무상 우유와 같은 지원 사례는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모른다. 빈곤 아동을 지원하면서 서럽게 상처를 입힐 바에야 차라리 지원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 또한 보여주기식 일시 지원보다는 가능한 한 장기간 지원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지원하면서 아이들이 청년으로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이들이 성인이 되어 새로운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지도록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빈곤 아동이 가난한 청년으로 성장해서는 안 되고, 빈곤 청년이 경제적 이유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게 만들면 안 된다. 빈곤한 부모와 아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양육 부담을 덜어주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한다면 결혼과 출산이 고소득층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빈곤 대물림 해소와 불안정성의 감소를 통해 저소득 청년들도 미래세대에 투자할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결혼과 출산을 하나의 ‘도박’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선택으로 여길 수 있다. 자연스레 저출산 문제도 해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를 낳으면 가난하고 불안한 환경에서 키울 수 있다는 두려움을 덜어주는 정책, 계층 고착화 사회를 벗어나도록 모든 아동에게 차별 없는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정책 등은 아동 빈곤 대책이면서 저출산 대책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이제 저출산의 근본 대책은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청년 문제 해결에서 더 나아가 이미 낳은 아이들을 잘 키워 끝내 출산을 포기하지 않도록 아동 빈곤과의 싸움이 돼야 한다. 아동 빈곤 예방은 저출산을 심화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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