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베일 벗은 女히키코모리…日 돌파구는 '15분 일하기' [김현예의 톡톡일본]

김현예 2024. 1. 1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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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예 도쿄 특파원

‘마침내 시간이 찾아왔다. 2018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난 2022년 세대주인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나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여성)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면접에서 ‘남녀 구별 없이’란 말을 하자마자 면접관 표정이 달라졌다. 30곳에 응시해 2곳에 붙었다. 일터에선 ‘대졸 여성은 쓰기 어렵다’와 같은 말을 들었다.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 화장실이었다. 파견직일 땐 전화 한 통에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사회에선 성폭행을 당할 뻔했지만 ‘대단한 일 아니니 잊어버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 나는 방에 틀어박혔다. 도망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도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히키코모리가 됐다.’ (50대 여성)

KHJ전국히키코모리가족회연합회(가족회)가 발간하는 잡지 '다비다치'에 실린 일본 히키코모리 여성들의 사연이다. 한국보다 20여 년 앞서 은둔형 외톨이 문제에 직면했던 일본에서, 최근 여성 히키코모리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3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히키코모리(15~64세)는 약 146만명. 15세에서 39세 사이에선 남성(53.5%)이 더 많았지만, 40~64세 연령대에선 여성(52.3%)이 남성(47.7%)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남성이 대부분이었던 4년 전 조사 때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일본 KHJ전국히키코모리가족회연합회 이케가미 마사키 부이사장과 우에다 리카 사무국장이 지난 12일 도쿄 도시마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가족회가 발행하는 잡지 '다비다치'를 소개하고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지난 12일 도쿄(東京) 도시마(豊島)구에 있는 가족회를 찾아갔다. 지난 1999년 히키코모리 문제로 고민하던 가족들이 중심으로 만든 단체로, 지난 23년간 잡지를 발행하며 자조 모임을 열고 있다. 최근엔 히키코모리를 위한 기본법도 정부에 제안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케가미 마사키(池上正樹) 가족회 부이사장은 여성 히키코모리 문제가 부각된 원인으로 ‘인식 변화’를 꼽았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정한 히키코모리의 정의는 ‘6개월 이상 가족 이외에는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학교나 직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때문에 일본 정부의 기존 조사에선 가사 노동을 담당하는 전업주부는 조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됐다. 지난해 조사부터 육아·가사를 하는 전업주부를 포함하면서 그간 감춰져 있던 여성 히키코모리의 문제가 드러났다.


“사회 문제 떠안고 있는 이들”


우에다 리카(上田理香) 가족회 사무국장은 히키코모리를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키코모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이들”이란 설명이다. 학교에서의 따돌림, 일터의 문제, 성폭력과 같은 다양한 우리 사회의 문제로 인해 ‘자신의 존엄을 빼앗기지 않을 장소로 숨어드는 것’이란 얘기다.
지난 12일 도쿄 에도가와구에 있는 KHJ히키코모리전국가족회연합회 사무실에 놓인 잡지. 가족회가 만드는 이 잡지는 한부에 500원에 판매된다. 가족회의 주요 수익원 중 하나로, 히키코모리 당사자 외에도 가족들의 고민과 상담,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고령화와 함께 부각되고 있는 ‘5080’문제도 언급했다. 80대 부모가 50대 히키코모리 자녀를 돌보면서 생기는 문제를 뜻하는 말로, 일본 사회의 고령화가 은둔형 외톨이 문제에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회에 따르면 접수된 상담 요청은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입원했는데 코로나로 병문안을 못 갔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이야기부터 치매를 앓게 된 부모님의 사례까지 다양했다. 우에다 국장은 “상담자 중 최고령자는 72세 여성이었는데, 모친이 사망하고도 쭉 홀로 지낸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최근엔 부모의 사망으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우에다 국장은 “사회로부터 자신의 방으로 숨어든 히키코모리의 경우, 함께 살던 부모가 사망해도 외부와 단절돼 사망했다는 신고조차 못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은둔형 외톨이는 최근 발생한 일본 노토반도 강진과 같은 재해 상황에 한층 취약하다. 우에다 국장은 “외부와 연계가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이 가능하고, 그렇기에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지만 상당수 히키코모리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케가미 부이사장은 “동일본대지진 당시에도 그랬지만 이번 노토 지진 때 함께 사는 부모가 도망치자고 해도 피난소 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피난하지 않거나, 차에서 일주일 넘게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12일 일본 에도가와구에 있는 과자점 '요리미치야'. 히키코모리를 위한 장소로 누구든 쉽게 찾아와 쉬거나 이곳에서 일할 수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마음 둘 장소' 마련해야


이케카미 부이사장은 최근 한국에서 시작된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정부 지원에 대해 “단순히 취업을 목표로 한 지원이 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제 40대 히키코모리의 90% 이상이 직장 생활을 경험한 이들로, 또다시 취업을 목표로 하는 지원을 한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느낄 수 있다”며 “중요한 것은 살아가고 싶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연결”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2일 일본 에도가와구에 있는 히키코모리를 위한 쉼터 역할을 하는 과자점 '요리미치야' 김현예 도쿄 특파원
그는 도쿄 에도가와(江戸川)구에 있는 히키코모리를 위한 과자점 ‘요리미치야'를 소개하기도 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지난해 1월 만들어졌다. 여느 과자점처럼 생겼지만, 이곳에선 도쿄도가 정한 최저임금(시간 당 1072엔·약 9730원)을 받고 일할 수 있다. 과자를 직접 주문하고, 얼마에 팔지 가격까지 정하는 일을 맡는다. 하루 15분부터 최대 3시간 근무할 수 있도록 돼 있는데, 이곳에서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한 은둔형 외톨이들은 용기를 얻어 취업에도 나서고 있다. 이케카미 부이사장은 “오랜 시간 은둔했던 사람들은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하기가 어렵지만 15분이라면 ‘한번 해볼까’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류의 장소, 직업 체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그간 잊고 지냈던 빛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히키코모리가 사회로 회복해 돌아오는 데 평균 9.2년이 걸린다. 우에다 국장은 “최근 도쿄도 역시 단순히 취업 지원,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하는 지원이 아니라 살아가려는 의욕의 회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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