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올해 제 결심은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네 글자 2024'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기획입니다. 2024년 자신의 새해의 목표, 하고 싶은 도전과 소망 등을 네 글자로 만들어 다른 독자들과 나눕니다. <편집자말>
[조성하 기자]
늦은 밤, 아찔하게 펼쳐진 청소 용품 코너 앞에서 또다시 배우자와의 논쟁이 시작됐다. 수십, 수백 개의 반들반들한 물건들을 훑다가, 화장실 물기를 제거하는 스퀴지를 무심코 집어 든 것이 불씨. 깔끔한 디자인에 단 돈 천 원이라는 가격으로 뽀송뽀송한 욕실을 만들 생각에 부푼 내 옆에서, 남편은 조용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어떤 쇼핑몰 화면을 쓱 건넸다. '올스텐 스퀴지 9000원'.
"청소 도구까지 굳이 9배나 주고 사야 해?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따지듯 내가 묻자, "몇만 원씩이나 하는 것도 아니고, 플라스틱 없는 집 만들기로 했잖아"라며 남편이 받아쳤다.
지난 몇 주간 원목과 유리와 스테인리스로 된 살림살이를 찾기 위해 발품, 손품 닥치는 대로 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데... "하지만 화장실에서만 쓰는 소모품이니까 이것만 봐줘. 다른 건 더 신경 쓸게." 극적 타결 끝에 스퀴지를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 동시에 몰래 챙겼던 작은 플라스틱 상자는 슬그머니 원래 위치로 돌려보냈고.
▲ 세상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다. 무엇을 구매할 것인가? |
ⓒ pixabay |
평소 건강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나의 동반자는 '플라스틱 제로, 환경 호르몬 제로 구역'을 서둘러 선언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pe(폴리에틸렌), pp(폴리프로필렌), pvc(폴리염화비닐) 등 합성 플라스틱 단어는 포함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런데 이 명료한 약속을 이행하기에는 꽤 녹록지 않은 장애물들이 기다렸다. 가볍고 알록달록한 데다 저렴한 제품은 모조리 플라스틱에서 나오는 세상이니까.
시작은 편백나무 가구였다. 너무 올드한 것 아닌가, 의심을 품고 우연히 들어선 매장에서는 상쾌하고 청량한 편백 향이 넘실거렸다. '미드 센추리 모던' 같은 트렌드 따위는 진작 망각해 버린 채 나무 향기에 취해 침대 프레임, 거실장,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를 덥석 계약하려는데, 아뿔싸 금액이… 제동이 걸렸다.
그렇다면 이게 삶에 꼭 필요한 것인가? 원목이 아닌 MDF(목재 섬유를 접착제와 함께 고온 고압으로 압착 성형하여 판재로 만들어, 가구 재료로 널리 이용되는 가공재의 한 종류)로 만들어진 가구는 아무리 친환경 E0등급이어도 미량의 포름알데히드가 배출된다. 반면 유해 물질 걱정 없는 편백나무의 피톤치드는, 새집증후군 퇴치에 탁월하고 습기에도 강해 평생을 두고 볼 수 있다.
▲ 처음으로 가구가 들어왔을 때 |
ⓒ 조성하 |
집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는 커튼도 그랬다. 동대문 커튼 시장에 가면 사장님들은 무조건 폴리 재질의 '차르르 커튼'을 보여줬다. 직물에서 떨어지는 미세 플라스틱을 피하기 위해 리넨이나 면을 찾는다고 말하면 비싸고 관리하기 어려운 걸 왜 굳이 사냐며 핀잔을 듣기도 했고. 이불 가게에 가면 재빠르게 꺼내주시는 마이크로 화이버를 거절하고 진열대 구석 두껍게 잠들어 있던 목화솜을 가리켰다. 쿠션 커버도, 테이블 매트도, 러그도 천연 섬유만 고집하며 신중하게 지갑을 열어나갔다.
조금 유난하고 까다로운 소비자가 되는 건, 마치 매일 밤 양치 후 꼭 치실을 사용해야 한다는 고뇌와 비슷했다. 번거로워 건너뛰고 그냥 자고만 싶은데, 시간과 돈까지 더 든다니. 그럼에도 분명 빠르고 간편한 삶보다, 고민을 거듭해 건강하고 오래 함께할 방식을 택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가진 소중한 무언가를 덜 놓칠 것만 같다.
따뜻한 나무 가구들과 소재의 고유함이 드러나는 물건들로 공간을 채우니 일부러 멋 부리지 않아도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정갈한 느낌이 좋다. 살 수 있는 제품이 많지 않아 강제 미니멀리즘이 되는 것은 덤.
조금 어려운 길을 가보기로 했다
올해는 직접 세운 원칙을 고집하면서 전보다 단정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신축 아파트의 시멘트 벽에선 끊임없이 유해 물질이 나올 것이고, 창문만 열면 숨이 턱 막히도록 초미세먼지가 뿌옇게 덮는 세상이지만. 모든 것이 흘러넘치는 정신없는 시국에 단단한 자기만의 닻 하나만 내린다면, 거친 파도에 그저 맥없이 떠밀려 가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를 한번 더 새긴다. 손수 가꾼 이 편백향 가득한 집에서만큼 보호받으며 쉬는 느낌만으로, 우리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받지 않을까.
물론 아주 가끔 세련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100% 폴리에스터 발매트가 눈에 들어오고, SNS에서 유명한 플라스틱 냉장고 정리템을 구매하고픈 충동이 찾아오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나 화려하고 유혹적인 것들이 당장 당신은 이것을 구매해야만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으므로. 그럴 땐 우리의 다짐을 상기하며 불쑥 밀려들어온 소비 욕구를 천천히 내보낸다. 대신 예쁘고 튼튼한 쇼핑백을 야무지게 접어 딱 맞는 종이 수납함을 만들면 된다.
집을 꾸며나가다 보니 어느새 내 모습 또한 스며들듯 만들어졌다. 라벨과 상세 페이지를 꼼꼼히 살피며 소비하듯, 유행 대신 취향과 개성, 원칙으로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치아에 좋다는 후박나무껍질은 또 어디서 알아왔는지, 사이좋게 껍질을 달인 따끈한 차를 나눠 마신다.
▲ 선물 받은 울 100%(중요함) 티코스터 |
ⓒ 조성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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