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폐광촌 바꾼 시리아 난민... 공생과 연대 설파한 88세 거장

나원정 2024. 1. 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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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개봉 영화 '나의 올드 오크'
英노장 켄 로치 15번째 칸 초청작
영국 거장 켄 로치 감독의 26번째 장편 영화 '나의 올드 오크'가 오는 17일 개봉한다. 사진은 그가 지난해 5월 27일 프랑스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 포토콜 행사에 참석한 모습이다. 로이터=연합

영국 노장 켄 로치(88) 감독의 신작 '나의 올드 오크'(17일 개봉)는 영국 폐광촌 사람들과 시리아 난민들 사이의 갈등과 연대 그리고 오래된 떡갈나무 같던 공동체에서 싹튼 귀한 우정에 관한 영화다.
영국 북동부 쇠락한 광산 마을에 시리아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다. 저마다 녹록지 않은 현실로 고통받는 동네주민들에게는 새로운 이웃들과의 사소한 나눔도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주민들만의 공유지라 믿었던 동네 술집 ‘올드 오크’의 주인 TJ(데이브 터너)가 오래 닫아 둔 뒷방을 이주자들을 위한 식당으로 개방하면서 분노는 터져 나온다.


"난민 적대시 주민들, 악마화 대신 분노 배경 이해"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영국 북동부 폐광촌에서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오른쪽부터)와 마을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 소녀 ‘야라’의 우정을 통해 유럽 이민자 문제를 되짚는다. 사진 영화사 진진
켄 로치는 지난 60년간 하루의 노동으로 빵과 장미를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맹렬히 쫓아왔던 사회파 감독이다. 켄 로치와 1990년대부터 작업해온 폴 래버티는 인권변호사 출신 각본가. 래버티는 극 중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노동계급 남자들에 대해 "악마화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살고 있는 지옥 같은 삶에 누군가 밀고 들어온다고 상상해 보라. 지금 영국의 젊은이들은 엄청난 좌절감에 빠져있다. 직업을 구하기도 집을 구하기도 어렵다. 사회에서 버려졌다고 느낀다. 설령 진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분노가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다.
이는 켄 로치의 영화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여든 넘은 나이에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 등 관료적 복지제도, 기만적 고용 형태 등 영국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칼날을 거둔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칼로 고단한 노동자의 배를 채울 통조림을 따고, 상처 입은 마음에 생긴 딱지를 긁어내고 기어코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낸다.

15번째 칸 경쟁 초청 88세 노장의 은퇴 선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의 황금종려상, '숨겨진 계략'(1990), '레이닝 스톤'(1993),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로 세 번의 심사위원상을 받은 켄 로치. 지난해 5월 '나의 올드 오크'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15번째 초청된 그를 현지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Q :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가?
"계획 없는 난민정책과 더불어 각종 미디어는 난민들을 '침입자'라고 칭한다. 그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집을 빼앗고 모든 것을 훔쳐갈 거라는 공포를 느끼도록 주입시켰다. 불안과 공포를 넘어선 적대감은 급기야 이민자들을 힘든 삶을 원망할 대상이자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영국 정부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잔재한 제국주의적 태도와 언론의 프로파간다는 훨씬 더 미묘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인종차별은 인종차별로 끝나지 않고 극우와 파시즘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결국 어디로 이어졌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Q : -영화는 흑백 사진들로 시작된다. 스틸 사진에 주목하고 주인공을 포토그래퍼로 설정한 이유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넓은 세상 속에서 무엇을 볼 지를 선택하는 일이다. 사진가를 꿈꾸는 난민 여성 야라(에블라 마리)는 펍의 벽에 걸린 사진 중 80년대 탄광 파업투쟁 당시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사진 한 장에 주목한다.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라는 문장이 쓰인 사진이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그는 ‘희망’을 보기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함께 모여 보는 야라의 사진 속에는 자신들과 함께 먹기를 선택해 준 따뜻하고 존경스러운 이웃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에서 영국 폐광촌 주민들은 갑자기 마을로 집단 이주해온 시리아 난민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사진 영화사 진진

Q : -결말은 당신이 꿈꾸는 이상적 세상에 대한 희망인가?
"현실적인 결말이라 믿는다. 연대는 긴 노동계급의 역사를 통해 이미 우리 속에 잠재돼 있는 요소다. 특히 조선·철강·광산 등 오래된 산업에는 투쟁과 연대의 전통이 있다. 80년대 더럼 탄광이 파업 투쟁을 이어갈 때 한 번도 동네 밖을 나가보지 않았던 프랑스·이탈리아·폴란드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와서 함께 싸웠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거리로 나갔다. 잠재적인 인종차별의 반대편에는 언제라도 연대하겠다는 의지 역시 존재하고 있다."

Q : -이 작품이 은퇴작이라고 선언했는데, 결심에 변함이 없는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건 멋진 특권이다. 게다가 내게는 훌륭한 영화 친구들이 있다. 이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한계가 왔다는 걸 느낀다. 현장에서 예전만큼 빨리 몸을 움직일 수 없고 하루에 12시간 이상 고강도의 감정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Q : -당신의 은퇴와 함께 사회파 영화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나.
"전혀 없다. 모든 영화는 그들 세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60년대에 새로운 좌파였던 반(反)스탈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집단들과 함께 세상을 배웠고, 새로운 세대는 그들만의 방식과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걱정이라면 우리 세대는 운이 좋아서 충분하진 않지만, 영화 제작자금을 만들 수 있었다면, 젊은 세대들에게 제작비를 모으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만들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주민들의 일방적인 이해만 강요하지 않는다. 극 중 사진작가를 꿈꾸는 난민 '야라'는 영국 폐광촌의 술집 '올드 오크'의 폐쇄된 뒷방에 걸린 사진을 통해 오래전 함께 밥을 먹으며 투쟁했던 마을 노동자들의 역사를 이해해나간다. 사진 영화사 진진

프랑스 칸=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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