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이준석이 DJP 연합? 비슷한 모델 따로 있다

김종성 2024. 1. 1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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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진영의 연대'라는 점 말고는 닮은 점 찾기 힘들어... 오히려 민국당 모델과 가깝다

[김종성 기자]

 이준석 개혁신당(가칭) 정강정책위원장(왼쪽)과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양향자 한국의희망 대표 출판기념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 관한 설왕설래가 생기면서, 'DJP 연대'라는 근 30년 전의 정치용어가 다시금 소환됐다. 옛날 일을 추억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의 현상을 빗대 설명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민주당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한 지난 11일, 이낙연 전 대표는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가칭 개혁신당 정강정책위원장인 이준석 전 대표와의 연대 가능성에 관해 "큰 틀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공감하고 있다"고 한 뒤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그 두 분의 거리보다는 저와 이준석 전 대표의 거리가 훨씬 가까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발언은 이낙연·이준석 연대의 성사 가능성이 DJP 연대 때보다 훨씬 높다는 직접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에 더해, 이낙연 전 대표가 1997년 대선 당시의 DJP 모델을 염두에 두고 정계개편에 나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두 진영의 연대라는 점은 같지만...

1997년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끈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대는 성공적인 정치 모델로 많이 거론되지만, 이것의 부정적 측면도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상 최초의 평화적·수평적 정권교체를 추동했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높이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나타난 민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구세력의 일원인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손잡았다는 점에서는 엄연한 한계를 갖는 일이다. 김종필을 이용해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선 이후로 한동안 그 결실을 공유해야 했고, 그로 인해 김대중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열망이 상당부분 무산됐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퇴임 1년 뒤인 2004년에 시작된 뉴라이트운동은 이명박·박근혜 정권뿐 아니라 윤석열 정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역사를 퇴보시키는 이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의 대선 승리가 구세력과의 연대에 기초한 불완전한 승리였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김대중 집권기에 개혁이 불충분하게 진행된 것이 뉴라이트운동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데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DJP 연대' 하면 아무래도 김대중 쪽에 강조점이 찍히지만, 김종필의 은근하고 끈질긴 의지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필은 1997년뿐 아니라 1990년에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해 1월 22일의 3당 합당 선언에 참여해 연초부터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일에 일조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도 NKK 같은 영어 이니셜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6월항쟁의 성과를 무산시키려는 구세력의 의도가 투영됐다는 점에서 DJP 연대와 공통점을 갖는다. 1990년 10월 25일 이후의 언론보도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종필과 노태우는 내각제를 목표로 3당 합당에 참여했다. 김종필이 DJP 연대에 합의한 것도 마찬가지다.

내각제 역시 정치적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구세력이 6월항쟁 이후에 추진한 내각제는 국민들의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분출되는 직선제에 대한 거부감을 배경에 깔고 있는 측면이 크다. 김종필은 그런 내각제에 대한 집념으로 3당 합당에 뒤이어 DJP 연대에 참여했다.

이 연대는 민주화의 진전 속에서 국민들의 직접 참정을 억제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세력의 열망이 깔린 것이었다. 이 연대를 통해 이익을 얻은 것은 김대중의 민주진영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대는 정치 성향이 다른 두 진영의 연대라는 점에서는 이낙연·이준석 조합에 비견될 만하다. 하지만 DJP 연대의 구조적 성격을 고려하면, 이 모델을 이낙연·이준석에게 대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과녁'이 두개인 상황
 
▲ 이낙연·이준석·금태섭·양향자 한자리에 이준석 개혁신당(가칭) 정강정책위원장(왼쪽부터), 양향자 한국의희망 대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금태섭 새로운선택 공동대표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양 대표 출판기념회에서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대는 1995년 6·27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부터 추진됐다. 이때 자민련은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않고 조순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강원도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자민련 최각규 후보를 응원했다.

이 연대는 김영삼이 이끄는 집권당에 맞서 김대중과 김종필이 뭉친 사건이었다. 더 나아가 김영삼 쪽에서 내세울 미래의 대통령 후보에 대한 두 사람의 공동 견제였다.
  
그에 비해, 이낙연·이준석 연대에서는 그 하나의 세력이 분명치 않다. 이낙연과 이준석이 경쟁할 상대는 각각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윤석열 대통령 및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국민의힘이 될 수 있다. 과녁이 둘로 나뉘기 쉽다는 점에서, DJP 연대와 구조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성공 가능성도 그만큼 반감된다고 할 수 있다.

DJP 연대가 작동하는 속에서 나온 것이 1997년 9월 13일 이인제 경기도지사의 신한국당 탈당이다.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한 이인제는 그해 12·18 대선에서 19.2%를 득표해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40.3%)이 한나라당의 이회창(38.7%)을 제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제공했다.

DJP 연대와 이인제 탈당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1995년부터 꿈틀댄 김대중과 김종필의 협력이 김영삼의 리더십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이것이 김영삼 진영에서 이회창과 이인제라는 두 후보가 나오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DJP 연대는 김영삼 진영을 겨냥해 작동했고, 이 진영을 약화시키는 제반 조건을 발생시켰다.

이낙연·이준석 연대가 DJP연대만큼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이 연대로 인해 상대 진영이 타격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 DJP연대는 의석수 1위 정당을 견제할 역량이 있는 정당이 주도했지만 현재 이낙연과 이준석에게는 그 만큼의 역량이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때문에 적을 하나로 압축하는 게 필수불가결이다. 이낙연은 이재명 공격에, 이준석은 윤석열·한동훈 공격에 치중한다면 DJP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DJP 연대는 만나자마자 사귄 커플이 아니었다. 대선 2년 전인 1995년 지방선거 때부터 초기 형태의 공조가 진행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는 '썸'을 거친 연대였다. 상호 이질적인 두 그룹이 연대해 대선에서 위력을 발휘한 데는 그런 사전 연습이 도움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총선을 3개월 앞두고 논의되는 이낙연·이준석 연대는 '썸'을 타다가 끝날 수도 있다. 썸 기간을 짧게 마치고 연대를 공식 선언한다 해도, 시간적 제약 때문에 DJP 연대만큼의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DJP연대 보다는 민국당에 가까워  

한국 현대사에서 이낙연과 이준석 만큼의 정치적 비중을 가진 세력들이 상호 이질성에 개의치 않고 연대한 또 다른 사례로 2000년의 민주국민당(민국당)을 들 수 있다. 민국당은 그해 3월 8일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우리 당은 보수와 개혁이 대등하게 만나 이 시대에 맞는 제3의 길을 모색할 것"이라는 창당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선출된 최고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김대중·김종필 못지않은 이질성이 민국당 참여자들에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9인 최고위원 중에는 장기표·이기택·김상현(A)도 있었고 김윤환·허화평(B)도 있었다. 1987년 이전만 해도 A와 B는 적대관계였다. 공안정국이 조성되면 B가 A를 체포할 수도 있었다. 그런 세력들이 민국당에 모였던 것이다.

이질성은 A 안에서도 나타났다. 12·12의 주역인 허화평은 김윤환과 동류인 B로 묶일 수 있지만, A 안의 세 사람은 서로 융화되기도 힘들었다. 재야운동가와 제도권 정치인 사이의 쉽게 극복될 수 없는 이질성이 A 내에 존재했다.

민국당은 2000년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급조됐다. 예전 같으면 원수처럼 지냈을 사람들이 호흡을 맞춰볼 틈도 없이 하나의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로 4·13총선에서 얻은 의석은 단 2개다. 그 뒤 민국당은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조직력이 미약하다'는 혹평을 받으며 4년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낙연·이준석 연대를 관찰하면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이들이 과연 민국당의 전철을 밟지 않고 성공적인 연대를 성사시킬 수 있을지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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