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타넘는 여성들, 이들이 이겨낸 한계
[이정희 기자]
▲ 디즈니플러스 <왓 이프...?> 포스터 |
ⓒ 디즈니 |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왓 이프(WHAT IF...?)>는 우리가 이미 마블 시리즈를 통해 알고 있는 서사에 '상상'의 날개를 단다. '만약 토르가 외동아들이었다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손 대신 심장을 잃었다면?' 영웅을 영웅으로 만든 그 결정적 계기에 대해 물음표를 단다. 이 신선한 상상력의 서막을 여는 건 바로 아메리칸 숄저다.
우리가 알고 있듯, 괴력의 사나이 아메리칸 숄저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빈약하고 자신감 없던 병사 스티브 로저스가 슈퍼 솔저 세럼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시즌 1의 첫 회는 바로 이 지점에 'What If?(만약에)'라고 말한다.
▲ MBC 드라마 <열녀 박씨 계약결혼뎐> 스틸 이미지 |
ⓒ MBC |
담을 넘는 여성들
12일 밤 첫 선을 보인 <밤에 피는 꽃>의 여주인공 조여화(이하늬 분)는 15년 차 수절과부이다. 그녀를 '마당과부'라 한다. 대문 밖은 언감생심, 얼굴 한번 본 적도 없이 혼인 날 죽은 지아비를 위해 사당에 들어 곡이나 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1회, 모처럼 시어머니가 양반 댁 여인들의 모임에 함께 가자하자 그녀는 수절 과부의 상징인 하얀 장옷을 펄럭이며 설레어 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저잣거리를 그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밤이 아닌 대낮의 저잣거리'란 말이 묘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는 조금만 행실이 흐트러져도 끼니조차 빼앗기는 수절 과부이지만 드라마의 제목처럼 밤만 되면 그녀는 검은 옷에 복면을 하고 담을 넘고 지붕을 탄다.
진짜 조선시대였다면 '음전'(함부로 행동함이 없이 정숙하고 단정하다)하지 못하다고 당장 쫓겨날 일이겠지만 드라마는 '만약'을 가정한다. 담을 타넘는 여성은 조여화뿐만이 아니다.
▲ MBC 드라마 <밤에 피는 꽃> 포스터 |
ⓒ MBC |
아름다운 미모에 사서삼경도 줄줄 외고, 말도 잘 타고 활도 백발백중이다. 이는 바로 박연우를 소개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조선 최고의 원녀가 되다니. 연우는 손재주가 남달랐다. 그녀가 만든 의복과 자수는 이른바 한양의 '핫 트렌드'가 되었다. 하지만 '삼종지도'(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가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삶이었던 조선 시대에 연우의 '재주'는 허락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하고픈 걸 하기 위해 담을 넘었고, 결혼을 거부하여 기꺼이 원녀가 되었다.
결국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 서방님이 눈 앞에서 죽어버리고 연우는 청상과부가 된다. 드라마는 담을 타넘는 것으로는 아쉽다 여겼는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 갇힌 연우의 활약을 위해 시간을 뛰어넘는 '자구지책'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자청하여 원녀가 되고자 했던 연우 외에도 연우같은 이들이 또 있었단다. 심지어 그녀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 하늘이 노해 가뭄이 든다고 조정에서 갑론을박까지 하니, 결국 나랏님은 자신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원녀 구제에 나선다. 여기에 장안에 능력자로 소문난 '중매쟁이'가 등장한다. 바로 방물장수 여주댁이다.
그런데 진짜 여주댁은 따로 있었다. 사실 잘 나가는 중매쟁이로 활약하는 여주댁은 그녀를 이름을 빌린 좌상댁 둘째 며느리 정순덕이었다. 그녀 역시 혼인한 지 반 년 만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청상의 답답한 삶 대신 현란한 화장 기술과 타고난 눈썰미에 감으로 '중매의 신'이 되었다. 이 일을 위해 그녀는 날마다 탐을 타넘는다.
▲ KBS 2TV 드라마 <혼례대첩> 스틸 이미지 |
ⓒ KBS |
나비처럼 날아서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세 드라마 <혼례대첩> <열녀 박씨 계약 결혼전> <밤에 피는 꽃>의 여주인공 정순덕, 박연우, 조여화 모두 담을 타넘고 있다. 담을 타넘는 것만이 공통점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드라마는 이들 세 사람을 모두 양반가의 청상 과부로 설정한다. 이들은 조선 시대에 '갑'의 지위를 가졌지만 그걸 누릴 수 없는 '을' 양반가 여주인공들을 통해, 그 시대가 가진 한계를 돌파하고자 한다.
그녀들은 양반이지만, 그걸 누릴 수도, 그를 통해 입신양명을 할 수도 없다. <열녀 박씨 계약 결혼전>에서 박연우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이 되듯, 그녀들이 하는 수절, 때로는 '목숨'도 건 이 '희생'은 시댁의 부귀와 영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그런 시절인대 조여화, 정순덕, 박연우는 그런 수절 과부의 삶을 넘어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한다. 무엇보다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서방님과의 애틋했던 사랑을 추억한다 변명을 해보지만, 중매쟁이로 동분서주하는 정순덕의 눈은 빛난다. 시대를 뛰어넘어 박연우를 구하는 건 조선시대 결혼보다 더 소중했던 그녀의 '손재주'이다. 조여화는 피를 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가난을 구하고, 사람을 도우려 한다. 그녀들의 가고자 하는 길, 하고자 하는 일 앞은 말 그대로 '그까짓' 담일 뿐, 그렇게 드라마는 사극의 상상력을 확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기꺼이 담을 넘는 그녀들이지만 정작 그녀를 에워싼 존재의 담은 거대하고 막막하다. 상단의 행수가 되달라는 화연상단의 행수 소운의 말에 조여화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좌의정 댁 맏며느리 청상과부 조여화가 아닌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겠냐고. 중매쟁이 여주댁이 좌상댁 둘째 며느리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위해서는 16부작의 서사가 필요했다. 이제 새로이 시작한 <밤에 피는 꽃>의 조여화가 과부로서 자신의 마당을 뒤쳐나오기까지는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도쿄가 들썩... 일본인도 감동시킨 김대중 다큐의 마지막 장면
- 세 분 판사의 위대한 업적,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 "그날, 바다는 잔잔했어요... 분명히 모두 살 수 있었어요"
- 용혜인 "'민주당 비토'가 새정치? 반윤개혁 최대연합 만들자"
- '서울의봄' 참군인을 찾아서 대전현충원에 모인 200여명
- 한동훈 두번째, 이재명 열여덟번째... KBS의 노골적 편애?
- 이틀 만에 5천만원..."살려주세요" 요청에 쏟아진 응원들
- 민주노총 경남본부 "진보정치 대단결로 총선 승리할 것"
- 민주당 대구·광주 지역위원장의 약속 "달빛특별법 총선 전 통과"
- 민주당, 이선균 사건에 '피의사실 공표' 법 개정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