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단 고음' 되찾았다…전신마비로 누워있던 록밴드 'AI 기적'
3옥타브의 고음 샤우팅 구간을 앞두고, 2인조 록밴드 더크로스의 라이브 무대가 잠시 멈췄다. 휠체어에 앉은 보컬 김혁건(43) 옆으로 전성기 시절의 그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실존 인물을 가상 공간에 구현하는 ‘디지털 트윈’ 기술로 만들어 낸 20대 후반의 김혁건이다. 가상의 김혁건이 전성기 때 폭발적 성량으로 노래를 이어가는 동안 잠시 숨을 고른 김혁건은 곡의 엔딩 ‘널 사랑해’ 부분에서 날카롭고 시원한 샤우팅을 내질렀다.
지난달 26일 JTBC 특집 ‘리얼라이브(RE-Alive)’가 공개한 더크로스의 데뷔곡 ‘돈크라이(Don’t cry)’ 무대는 현실과 가상의 김혁건이 듀엣으로 초고음 부분을 완성하며 마무리됐다. 20년 지기 멤버 이시하(44)는 “아직도 김혁건이 일어나서 노래하는 꿈을 꾸곤 하는데, 이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눈물을 보였다. 지난 10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더크로스의 두 멤버를 만났다.
" “음악 작업을 하면서 우울증약이 4분의 1로 줄었어요.” " 담담한 말투였지만, 김혁건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2012년 불법 유턴하던 차에 부딪혀 전신 마비 판정을 받은 뒤, 2년 반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당시의 영상을 얼마 전에 보게 됐는데, 지금까지도 숨이 턱 막히면서 눈물이 나더라”면서 “죽지 못해 살아있던 시기였다”고 떠올렸다. “사고 후 1년이 지났을 무렵 욕창으로 고생하던 중 (자신의 교통사고)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장애인이 됐다는 인지를 못 해 화가 났고, 방송 출연 등 모든 스케줄을 거부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를 세상 밖으로 꺼내준 것은 음악이었다. 재활 중 발성 연습을 하던 그는 배를 누르면 소리가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복식호흡 보조장치의 도움을 받아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이시하는 “혁건이는 제게 ‘의사가 나를 왜 살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힘들어했다”며 “애국가 1절을 부르고 자신감을 얻었을 때쯤 대중 앞에 서보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고 말했다. 2014년 ‘스타킹’(SBS)을 시작으로 2020년 ‘슈가맨’(JTBC)까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점점 따라주지 않았다. “무리하게 배를 누르다 보니 염증이나 혈뇨가 생겼고,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특히 고음을 지르고 나면 몸에 경직이 왔다”고 김혁건은 말했다. 더크로스 2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신곡 작업을 함께 하던 두 멤버의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더는 다치기 전과 같은 예쁜 음색이 아니니 고음·샤우팅 없이 만들어보자”는 김혁건과 “더크로스의 상징과 같은 고음과 샤우팅을 꼭 넣고 싶다”는 이시하는 오랜 고민 끝에 타협점을 찾았다. AI(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 “고(故) 김광석의 목소리를 학습한 AI가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부르는 방송을 우연히 봤는데, 깜짝 놀랐어요.” " 더크로스는 AI 오디오 기업 수퍼톤에 의뢰해 반년에 걸친 작업에 들어갔다. 수퍼톤 스튜디오팀의 이영국 팀장은 “김혁건의 데뷔 이후 20년 간의 음성을 수집해 데이터 학습으로 AI 음성화했다. 가장 까다로웠던 부분은 샤우팅 창법 구현이었는데, 4옥타브 이상의 고음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정교한 피치 조절을 가능케 하는 기술을 동원했다”고 말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김혁건은 “김광석 씨는 그 시절의 목소리로 남아 있지만, 저는 실존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20년 전과 지금의 목소리가 다르다. 비브라토(음의 떨림)나 소리를 꺾는 등 보컬의 기교나 스킬(기술)을 원하는 대로 쓰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음원 녹음은 AI 없이 진행이 가능했지만, 라이브 무대는 달랐다. “건강 때문에 호흡이 짧아지면서 현실적으로 AI 없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녹음실에서는 한 소절 부르고 쉴 수 있지만, 무대는 3~4분 간 온전히 목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이라며 “결국 AI의 도움이 있었기에 더크로스의 음악 세계를 무대에서 표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돈크라이’에 맞먹는 초고음이 포함된 신곡, ‘바람의 시’와 ‘너에게 닿기를’ 라이브 무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록발라드 ‘바람의 시’가 더크로스의 정체성을 집약했다면, 현재 일본에서 인기 있는 록 스타일을 담은 ‘너에게 닿기를’은 향후 더크로스의 방향성을 담았다. 두 싱글 곡은 지난달 일주일 간격으로 발매됐다.
이시하는 “사고 직후 혁건이가 ‘곧 죽을 것 같다’며 겁을 많이 줘서 불안감에 휩싸였던 때가 있었다”면서 “최근 다시 함께 작업하면서 불안감이 사라지고, 신인 때처럼 무대 위 긴장감으로 채워져서 너무 좋았다.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있을 때 후회 없이 더크로스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남겨놓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고 했다.
옆에서 오랜 파트너에 대한 감사의 미소를 짓던 김혁건은 차분히 말했다. “몸이 받쳐주는 한 계속, 오랫동안 음악할 겁니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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