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수유, 낮잠도 봐주는 고교…텍사스에 '고딩 엄마' 많은 이유 [세계 한 잔]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 미국 텍사스 브라운스빌에 사는 여고생 야레지 알바라도(17)의 책가방에는 교과서와 함께 분유와 젖병이 들어있다. 알바라도는 한 살배기 딸 카밀라와 함께 학교에 가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기저귀, 물티슈, 딸의 여벌 옷까지 챙기고, 스쿨버스에 설치된 영유아전용 카시트에 딸을 앉혀 등교한다.
그가 다니는 링컨파크 고교에는 임신했거나 최근 출산한 14~22세 여학생들이 다닌다. 만삭의 여학생도, 영유아 자녀와 등교하는 여학생도 흔하다. 수업 중에는 교내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다. 언제든 수유도 가능하다.
AFP통신에 따르면 텍사스에 이렇게 탁아시설까지 갖춘 고교가 있는 이유는 주(州)에서 도입한 낙태 금지 정책과 연관이 있다. 2022년 6월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연방 차원에서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 이후, 현재 미국 일부 보수적인 주(州)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텍사스는 임신 기간 중 거의 모든 단계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미국 내 13개 주 중 하나다. 이곳에서 의사가 낙태 금지법을 어기면 최대 99년의 징역형과 최소 10만 달러(약 1억3000만원)의 벌금을 선고받을 수 있다. 특히 텍사스에서는 미성년자가 피임약을 복용하려면 반드시 성인 허가가 필요하다. 학교 내 성교육도 의무가 아니다. 이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교육환경이 낙후되고 저소득층 가정에서 자란 히스패닉 여고생을 중심으로 텍사스에 '고딩 엄마'들이 느는 추세다.
"10대 임신 쉽게 안 사라져"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에 따르면 2022년 미국 15~19세 출산율은 전년 대비 3% 감소했다. 이는 1991년 대비 78%나 떨어진 수치다.
하지만 비정부기구(NGO) '텍사스의 건강한 미래'가 조사한 결과, 2021년 텍사스에서 젊은 히스패닉 여성의 출산율은 젊은 백인 여성의 출산율보다 2.4배 더 높았다. 특히 브라운스빌은 히스패닉 인구가 94%라고 BBC가 전했다. CDC는 "교육 수준과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낮은 저소득 가정에서 10대 여성의 출산율이 높다"고 지적했다.
통신은 "미성년자의 임신·출산·보육 문제는 점점 더 민감한 문제가 되고 있지만, 교육계에선 이 문제를 논의하기를 꺼려왔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링컨파크 고교 교장인 신시아 카르데나스는 AFP통신에 "10대 임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교육계가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교내 탁아소 도입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임신은 장애가 아니다"면서 "10대에 임신·출산을 했어도 (대학 진학 등) 미래를 향한 기회가 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임신한 여고생은 학업 중도포기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NGO인 차일드 트렌드에 따르면 전미 여고생 졸업률은 90%이지만, 임신하면 53%로 뚝 떨어진다.
알바라도처럼 그나마 어머니와 학교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다행이지만, 상당수의 '여고생 엄마'들은 모교에서 차별당하거나, 가족들에게 거부당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처지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학교를 관두는 사례가 속출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링컨파크 고교처럼 교내 탁아소 설치 등으로 여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돕는 경우가 나오고 있다. 현재 링컨파크 고교 내 어린이집은 영유아 16명을 모집해 돌보고 있다. 인기가 높아 대기자 명단에 있는 유아들도 여럿이다. 학교 측은 10대 엄마들이 학업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통신은 “교직원과 교사들은 학생들이 의사 진료를 받거나 아기를 간호하느라 밤새 고생해 가끔 수업에 결석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고 전했다. 출산 후 집에 있는 학생들을 담당 교사가 방문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주(州)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링컨파크 고교에는 전문 간호사가 직원으로 상주해 학생들과 영유아 자녀의 건강을 돌본다.
이 학교 과학 교사인 조지애나 윌슨은 “아기가 밤새 깨어 있거나, 아기가 아파서 어려움을 겪는 여학생을 볼 때도 있다"면서 "그럴 땐 수업시간이라도 학생을 10분간 낮잠을 자게 두는데 다른 학교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알바라도는 AFP통신에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숙제를 따로 내지 않고 일과 중에 공부를 끝내기 때문에 집에 가서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향후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그는 "내가 수업받는 동안 딸이 가까이 있고, 교내 어린이집에서 보살핌을 잘 받고 있단 사실이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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