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틀어주면 나갈 때 재미없다"는 협박성 메모도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우리나라 최초로 물에 녹는 인스턴트커피가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12월 20일이었다. 동서식품은 이 신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사은 판매 전략을 폈다. 커피 용기 뚜껑 부분에 부착된 사은권 12매를 수집하여 가져가면 레귤러커피 450그램짜리를 무료로 교환해 주는 행사였다. 신문마다 사진과 함께 광고가 실렸다. 미국 맥스웰하우스의 유명한 광고 문구 'Good to the last drop'(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는)이 선명하게 새겨진 큼지막한 커피 용기 사진이 신문마다 실렸다.
국산 커피의 본격적인 시장진출로 커피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71년 <조선일보> 신년 특집호 '나의 소원'에 등장한 30대 회사원 한소영씨는 "커피값이라도 아껴서 피아노나 한 대 마련하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피아노가 쌌을 리 없다. 커피가 비쌌던 시절이다.
1971년은 세계적으로 록 음악의 전성기였다. 존 레넌이 '이매진'을 발표했던 것도 이때였다. 레넌은 "무엇을 위해 죽여야 하거나 죽을 필요가 없는" 그래서 "종교조차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절규하였다. 3년 전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서유럽 전체, 미국, 일본까지 번졌던 이른바 68혁명 세력이 꿈꾸는 세상이었다. 이매진이 울려 퍼지던 그해 들어 68혁명의 열기가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였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금지곡으로 묶여 들을 수 없었다. 가사에 나오는 "나라가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가 무정부주의(아나키즘)를 부추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해에 발표된 김민기의 '친구'나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다. 금지곡 리스트를 피한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지' 등이 방송을 지배했다. 롯데공업이 과자의 전설 '라면땅'과 '새우깡'을 출시한 것도 이 해였다.
3선 개헌으로 실시된 4월 28일 선거에서 박정희가 세 번째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학원 병영화 정책에 따라 교련 교육을 강화하자 대학가를 중심으로 교련 반대 시위가 격하게 벌어졌으며, 주요 언론사를 중심으로 언론자유 수호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어용학자는 있었으나 '기레기'는 없던 시절이다.
▲ 1971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생활경제 - 다방출입 한해의 내역"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외제 커피 팔던 다방 7곳 입건', '카빈소총 든 10대 둘 다방서 난동', '다방레지 반라로 피살', '연탄과열 다방에 불', '커피값 불법인상 업소 입건', '기획원 커피값 환원 지시' 등 커피 관련 뉴스가 넘치던 시절에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새 직종인 다방 DJ 소식이었다.
DJ는 '디스크자키'(Disc Jockey)의 약어다. 영어 단어 디스크(disc)는 원반을 의미한다. 음악이 녹음되어 있는 판이 원반을 닮아서 붙여진 애칭이 보통명사로 발전했다. 자키(Jockey)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DJ는 청중에게 녹음된 음악을 틀어주는 기술자다.
1935년 미국의 라디오 평론가 월터 윈첼이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녹음된 음악을 틀어주던 아나운서 마틴 블락에게 붙여준 것이 시작이었다. 인쇄 매체에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1년 잡지 <버라이어티>를 통해서였다.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라디오 DJ의 영향력은 최고였다. 새로 나온 노래의 인기나 음악 장르의 유행을 좌우하는 것은 라디오 DJ의 몫이었다. 자본을 앞세운 기획사나 언론사의 파워가 아니었다.
이런 DJ 문화가 우리나라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1964년에 동아방송에서 '탑튠쇼'를 진행한 최동욱이 최초의 라디오 DJ였다. 금년 초에 타계한 최동욱은 이후 '세시의 다이얼,' '최동욱쇼,' '추억의 팝송' 등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DJ는 역시 최동욱"라는 표현이 들릴 정도였다.
이즈음 대중적인 인기에서 라디오 DJ와 견줄 수 있는 한국적인 특성을 지닌 새로운 DJ 집단이 등장하였다. 도시를 중심으로 다방의 번성이 낳은 묘한 직업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서울 인구 500만 명 돌파를 기념하여 1970년 10월 1일부터 서울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연재물 '서울 새풍속도'를 싣고 있었다.
▲ 1971년 8월 10일 <경향신문> 기사 "서울 새풍속도 (213) 명동 [13] - 부업에서 새 직종된 DJ"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서울을 중심으로 DJ를 둔 음악다방이 늘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새로운 흐름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전문 DJ 없이 음악을 틀어주는 업소였는데 5.16쿠데타 이후 풍기문란의 온상으로 지적되어 단속의 대상이 된 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고등학생들의 출입이 문제였다. 이것을 대체한 것이 음악다방이었고 주인공은 DJ였다.
1971년 당시 명동을 중심으로 서울에만 50여 개의 음악다방이 있었고, 이곳에서 일하는 디스크 플레이어는 서울 시내에 모두 8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초기 DJ는 대부분 남성이었기에 'DJ 오빠'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당시 DJ 한 명이 월 1만 5000원 정도의 급여를 받고 오후 3시부터 밤 9시 넘어까지 작은 뮤직박스 안에 앉아서 틀어주는 음악은 무려 180여 곡이었다. 극한 직업이었다. 물론 크고 유명한 몇몇 다방에서는 여러 명의 DJ가 시간을 나누어 진행하였다. 손님들은 커피 맛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DJ가 진행하는 시간에 맞추어 다방을 찾았다. 손님들이 메모지에 적은 간단한 사연이 읽혀지고, 신청하는 음악이 들려지는 방식이었다.
인기 있는 DJ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쪽지가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DJ들이 도끼빗이라고 불리던 커다란 빗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긴 머리를 빗어 넘기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던 이유이기도 하다. 단골손님이 들어오면 DJ가 알아서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는 특혜를 주고, 손님은 DJ에게 커피 한잔을 전해주는 장면은 다방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DJ들이 들려주는 애환은 자못 흥미롭다. "안 틀어주면 나갈 때 재미없다"는 협박성 메모 쪽지를 받기도 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3류 가수들이 자신의 곡을 선전하기 위해 DJ에게 뇌물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런 과정을 통해 신인 가수의 노래가 방송을 타는 경우도 생겼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음악 시장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뇌물에 맛을 들인 DJ 중에는 가수를 찾아가 금품을 요구하는 불상사도 생겨났다.
다방 DJ 중에서는 음악에 대한 지식이 대단한 수준에 이른 사람, 이야기 솜씨가 뛰어난 사람, 여러 개의 턴테이블과 레코드를 조작하여 기묘하고 환상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스스로 습득한 사람 등이 나타났다. 방송국 DJ나 음악 PD로 진출하여 동종 업계 종사자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 적지 않았다. DJ가 취미 수준의 부업이 아니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새로운 직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해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대학에 위수령을 발표한 후 10개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어서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군사 독재에 대한 저항의 불꽃이 타오르던 그해 12월 25일 오후 서울 남대문에 있던 21층짜리 대연각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 있어서 사망자가 166명, 실종 25명, 부상자 68명에 달했다. 불길을 피해 고층에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장면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비극이었다.
세계 최대, 최악의 호텔 화재라는 기록으로 남은 이 비극이 시작된 장소는 2층 커피숍이었다. 커피숍의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하면서 생긴 화재였다. 반성은 없었다. 1972년 시민회관 화재(51명 사망), 1974년 대왕코너 화재(88명 사망)를 겪었다. 역사는커녕 경험으로부터도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 밝은 미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 교수)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1971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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