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비법 찾던 사람들, 불상의 배꼽을 부쉈다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선운사 호젓한 선운사의 가을. |
ⓒ 이영천 |
미륵불이라 부르는 마애불은 수직의 높은 절벽에 새긴 부조 좌불(坐佛)이다. 천연 절벽 중간에 양각과 음각을 섞어 거대한 불상으로 부조하였다. 평평하고 각진 얼굴에 다소 근엄하고 위압적인 표정이 이채롭다.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꼬리, 양각된 오뚝하고 높은 콧날, 도드라진 일자형 입술은 근엄하여 위압적이지만, 오묘한 표정에 미소를 띠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한 기운에 젖게 만든다. 목선은 거의 생략에 가깝고 사각의 상체는 하체에 비해 다소 빈약해 보이며 넓은 가슴은 평평하여 밋밋하다.
▲ 도솔암 마애불 수십미터 높이 수직 절벽에 부조된 마애불. 비결을 넣어 두었다는 가슴 사각이 도드라져 보인다. |
ⓒ 이영천 |
연화대 위에 좌정하여 배꼽에 커다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을 가슴 아래쪽 치마에서 띠 매듭으로 마무리하였다. 사람 모습에 가까우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한편, 뭔지 알 수 없는 엄숙한 비장감을 느끼게도 한다. 그 옆 우아하게 늙은 소나무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정감록이나 미륵신앙의 등장과 확산은 혼란한 조선 후기 사회상의 반영이었다. 사회를 지탱하던 종교와 사상이 한계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민중과 멀어지게 된다. 서구열강 및 일본의 침략과 국내외 여러 위기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열망을 부추겨 미륵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빠르게 확산한다.
민중들은 미륵신앙에서 현실변혁과 말세 의식, 구세주, 이상세계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표출시킨다. 이런 열망이 행동으로 연결됨으로써 미륵신앙이 하나의 사회변혁 이념으로 떠오르게 됐다. 하지만 사회 전체를 뒤엎을 만큼의 변혁 요인으로 작동하진 못했다.
비결을 꺼낸 자가 왕이 된다는 전설
임진년(1892) 팔월의 일이다.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 도솔암 남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오십여 장이나 되는 층암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바위 전면에 큰 불상 하나가 새겨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석불은 삼천 년 전 검당선사(黔堂禪師)의 실 모습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다고 하며,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멸망한다는 말들이 자자하였다.
그 증거로 103년 전 전라감사로 내려온 이서구라는 사람이 부임한 직후 상서로운 기운이 남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무장 선운사에 이르러 도솔암 석불의 배꼽을 열고 그 비결을 꺼내었다가, 때마침 뇌성벽력이 일어 그 비결을 다 보지 못하고 다시 봉해 두었다 하며, 그 비결의 첫머리에 쓰여 있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봄'이라는 글자만 보고 말았다고 하는 것이며,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열어보고자 하였으나 벽력(벼락)이 무서워서 못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70~171에서 의역하여 인용)
1890년대에 이르러 삼정 문란과 조세 수탈에 더하여 탐관오리 축재수단의 하나로, 동학도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하여 잡아들인 후 돈을 받고 방면하는 악행이 횡행하고 있었다. 이에 팽배한 불만이 민중 속으로 급속히 확산하고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이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 도솔암 마애불 전경 수직 절벽 중간을 안으로 파내고 부조한 거대한 마애불의 모습. 배꼽 비결을 꺼낸 무장 동학도의 결기가 그려진다. |
ⓒ 이영천 |
선운사가 속해있던 무장은 물론이고, 전라도 각지에서 마애불 비결이 곧 세상에 나올 것이란 풍문이 광범위하게 떠돌기 시작한다. 이를 꺼낼 사람은 다름 아닌 동학 무장 접주인 손화중이라 하였다(관련 기사: '나를 밀고하시오'... 인품만으로 세상 놀라게 한 이 사람 https://omn.kr/26zas ). 마애불 배꼽을 여는 장면이다.
어느 날 손화중 접중(接中)에서 선운사 석불 비결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꺼내 보았으면 좋겠지만 벽력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자리에 오하영(吳河泳)이라는 영광 접주가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봐야 할 것 같으면 벽력이라는 건 걱정할 게 아니다. 내가 들으니 그처럼 중대한 걸 봉해 놓을 때는 벽력살이라는 것을 넣고 택일하여 봉하면 후대 사람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 지금은 열어보아도 아무 일 없으리라고 본다.
이서구가 열어보았을 때 이미 벽력이 일어나 없어져 버렸으니 어떤 벽력이 또다시 있어 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는 건 당연하니 여러분은 염려하지 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 하는 것이 좋겠다. 여는 책임은 내가 맡아 하리라" 하였다. 좌중은 그 말이 가장 타당하다 하여 대나무 수백 개와 새끼줄 수천 발을 구해 비계를 만들어 석불 전면에 세우고, 석불 배꼽을 도끼로 부수어 그 속에 있는 비결을 꺼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71에서 의역하여 인용)
마애불 배꼽을 열어젖힌 건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더는 탐관오리 침탈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자,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자발성에 기인한 저항이 잘 준비되고 있다는 선전포고였다. 마애불에서 비결을 꺼내 후, 무장 손화중 포로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무장 포는 이런 열망을 받아안아 전라도 동학 최대세력으로 성장한다.
▲ 무장 읍성 동학혁명의 교두보가 되었던 무장의 읍성. 초등학교가 옮겨가고 지속 복원 중이다. |
ⓒ 이영천 |
현감은 감사에게 보고하여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으나, 이미 무장 관리들이 동학에 입문한 도인이어서 집행은 불가능했다. 결국 비결이라며 불경을 건넨 뒤, 무장 동학도 힘으로 갇힌 사람들을 구해낸다. 현감이 수천 명의 대규모 야간 시위에 겁먹고 타협한 결과다. 동학 세력은 이미 한 고을 현감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수백 년 약탈 당하던 민중이 '평등'을 깨칠 때
동학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구체제의 가장 큰 폐단인 계급모순의 근본적 혁파를 주장한 '모든 인간은 동일 인격체로 평등하다'는 종지(宗旨, 종교의 주된 가르침) 덕이다. 최제우는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을 표방하며 '사람이 한울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한울님이 계신다' 하였다.
▲ 마애불과 내원궁 수직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과 그 위 내원궁. |
ⓒ 이영천 |
동학은,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취해 유불선 같으면서도 유불선은 아니라 하였다.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법'을 추구하였다. 마음과 기(氣), 밥 3가지를 잘 먹어야 잘 사는 것이라 하였다. 시천주(최시형 사인여천(事人如天), 손병희 인내천(人乃天))는 개인의 주체성을 중시함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기본이다. 이런 기치만으로 말기 증세를 보이던 조선사회의 민중 속으로 빠르고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었다. 내세(來世)가 아닌 현세(現世)를 근본으로부터 바꾸자는 후천 개벽으로, 교리 자체로도 구체제를 뒤엎자는 실천 사상이었던 셈이다.
마애불 배꼽을 열어젖힌 동학도들은 무얼 바랐을까?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왕과, 그런 왕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왕비를 필두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여흥민씨 정권에 분노했을까. 나라를 야금야금 침범하는 외세에 대한 경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계급모순과 수탈, 부패한 관리에 대한 적개심은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을까.
▲ 선운사 골짜기 천마봉에서 바라 본, 도솔암 마애불을 중심으로 멀리 소요산이 보이는 선운사 골짜기의 봄. |
ⓒ 이영천 |
마애불을 뒤로 하고 선운사를 빠져나온다. 가까이 있는 '미당 시문학관'을 찾는다. 친일에 복무한 그의 시문학관을 둘러보는 내내, 오묘한 표정의 마애불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2024년의 석불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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