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싸웠던 전인권, 그가 장발을 고집한 이유
[강인원 기자]
전인권은 1년 365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게 손가락으로 박자를 세어가며 연습하는 연습 벌레라고도 할 수 있다. 천재는 1%의 천재성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그는 어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소리 연습으로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전인권 고통을 감추고 있는 듯한 선글라스 안의 눈빛이 궁금해지는 전인권을 아이패드로 그린 것 |
ⓒ 강인원 |
전인권의 목소리에 서려있는 슬픔이나 고통이 그의 노래를 환호받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환호 속에 숨어있는 그의 과거, 외로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처절했을 수도 있다. 노래하는 사람이 무대 위에서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몰입을 터득하기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수 천명의 가수 중에서 3%도 안될 만큼 완전몰입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 대열에 우뚝 선, 몇 안 되는 진정한 보컬리스트라고 생각된다. 그의 포효를 들을 때면 그가 보여주는 초능력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대 초반, 나는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고 종로 2가의 '3월4월'이란 이름의 통기타 살롱(그 당시엔 그렇게 불렀다)에서 고정출연 가수로 일하기로 했다. 당시 월급은 한달에 3만 원이었다. 그때 이미 고정 출연 가수로 노래하고 있던 그를 처음 만났다. 1주일 정도 내가 그의 노래를 듣고, 또 그가 내 노래를 듣고 판이한 노래 스타일과 소리에 서로 호감을 가지고 친해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 전인권은 긴 장발을 하고 있었다. 자유롭게 흐트러진 그의 긴 생머리는 짧고 단정한 내 생머리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의 자유로움에 난 약간의 위축감을 느꼈다. 하드 록 그룹 레드 제플린의 리드싱어 로버트 플랜트 같은 그의 긴 생머리가 사실은 가발이었다. 머리카락이 벗겨진 사람들이 썼던 가발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의 언어였다.
당시는 남성이 장발로 거리를 걷다가경찰관에게 적발되면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가위로 싹둑싹둑 잘리던 시대였다. 그는 비록 가발일지라도 장발 수호를 위해서라면 거리의 경찰관에 대담하게 맞서나가며 이 골목 저 골목 필사의 도주를 서슴지 않았다.
기성세대의 고착된 관념에 대항하는 용기
자유란 참으로 소중한 주제다. 그의 가슴 속에는 응어리진 자유가 웅크리고 있었을 것 같다. 전인권에게는 장발을 통하여, 어떤 이에게는 반항을 통하여, 또 다른 이에게는 방랑을 통하여 각기 나타내는 부위가 다를 뿐, 음악인에게 있어 자유란 의식의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날개인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 수록된 들국화의 첫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그의 노래가 좋다는 소문은 이미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그 소문을 들은 TV 방송국 관계자가 전인권에게 출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방송국에 가서 리허설을 하던 중, AD(조연출)가 "전인권씨 머리 좀 자르고 나오면 어떨까요?" 하니까 옆에 있던 PD(연출자)가 조심스레 "아니, 그러지 말고 뒤쪽으로 묶어볼까? 단정하게만 보이면 되니까" 라고 눈치껏 수정 제안을 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아뇨, 안 되겠는데요"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홀가분하게 돌아서 방송국을 나온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는 애초부터 음악 활동 영역에 방송 활동을 끼워넣지 않았다. 전인권과 대중들과의 유일한 만남의 무대는 콘서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가 갖고 있던 콘서트에 대한 집념과 애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장소에서건, 사람들만 모여준다면 그는 거침없이 노래를 불러댔다.
클럽의 5~6명 앞에서도, 소극장의 20~30명 앞에서도, 대학교 강당의 몇 천명 그리고 잠실 운동장의 2~3만 명 앞에서 그는 긴 장발을 휘날리며 젊음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수많은 콘서트에 볼 수 없던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 포효하는 전인권 늘 슬픔과 고통이 서려있는 듯한 포효하는 전인권의 노래하는 모습을 아이패드로 그린 것 |
ⓒ 강인원 |
1978년~1979년의 따로 또 같이 시절, 그와 난 두 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를 강 박사, 전 박사로 호칭하며 친구도 아니고 형 동생 관계도 아닌 일종의 존중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난 노래 연습하다 지칠 때 종종 크레파스와 색 연필로 누가 더 그림 잘 그리나 내기를 하곤 했다.
나보다 조금 더 그림을 잘 그리는 그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
"노래하는 게 잘 안 풀리면 난 만화를 그릴거야, 기발나게 재미난 그림을 그릴 자신이 있어. 강 박사는 내 조수로 써줄게."
그의 동화같은 꿈은 항시 넘실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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