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강남 8학군을 아시나요? 정치인 한동훈
꼬리표 처럼 따라다니는 '강남 8학군', 예루살렘처럼 과장돼…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중산층 동네'
한동훈 주연으로 135석 노리는 여권…영부인 리스크 관리 잘하고 대통령과도 차별화돼야 가능
한동훈, 애매모호한 '좌클릭' 남발하면 '패션 우파' 철퇴…이념의 살의 견디고 구업(口業) 쌓지 말아야
누군가 길을 걷다 연예인 아우라와 웅성거림이 느껴져 돌아보니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고 기자들은 그의 말 한 마디를 놓칠세라 열심히 받아쓰기 중이었다고 한다. 팬덤과 신드롬이 거론될 정도의 실로 엄청난 인기다. 보수진영에서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았던 정치인이 있었던가.
언뜻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생각나지만 이들은 원래부터 대중정치인의 옷을 입고자 했던 사람들이고, 이 나라에서 기자만큼이나 극혐의 대상이라는 검사 출신으로 순식간에 메시아급 각광과 칭송을 받으니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지경이다. 선천적으로 어지간한 것은 다 잘하는 천재성과 후천적으로 어느 시점에서부터 각고의 노력으로 기른 하심(下心)이 일조를 했으리라.
이런 한 위원장이 자란 ‘강남 8학군’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 다니며 무슨 예루살렘이라도 되는 양 유난스럽고 과장된 모습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한 위원장과 같은 시기 그 곳에 머물렀던 8학군 1세대로서 그 시절의 풍경 몇 가지를 소소하게 전하고자 한다. 지나간 것에 대한 맹목적인 감상과 그리움으로 일견 왜곡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겠지만 ‘소년 한동훈’은 기꺼이 공감해주리라.
우선 당시 강남 8학군은 대치동 영역과 서초동 영역, 압구정동 영역 크게 3군데로 나뉘어 어느 영역의 고등학교에서 학력고사 수석이 나왔느냐가 늘 관심사였다. 아직 서울에서 외고와 과학고가 본격적인 위상을 자리 잡기 전이어서 이 동네 학교들에 더욱 관심이 쏠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치동 학원가는 태동의 씨앗조차 보이지 않았고 양재천에서 개구리 잡고 놀던 세월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때였다.
집들은 다 밥 먹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재벌집 아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별히 두드러지거나 잘난 것도 없는 전형적인 중산층 동네로, 부모님들이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집들이 많았다. 다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선생님들은 군인 장성 아버지를 둔 아이들에게는 눈에 띄게 친한 척을 하며 각별히 챙겼다. 운동장에서 얼룩말 군복을 입고 플라스틱 총칼을 휘두르는 교련 수업과 전교조 출범을 앞둔 운동권 출신 선생님들의 눈물 겨운 사상교육이 날마다 코미디처럼 교차했다.
한 위원장처럼 못하는 것이 없는데 집도 잘 살고 성격, 리더십까지 갖춰 반장, 회장을 도맡아 했던 친구들이 전교 1등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롯이 공부에만 특화된 대체불가의 압도적인 별종들이 학교 마다 한두 명씩은 꼭 있었다. 팔방미인들이 결코 공략할 수 없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굳이 숫자로 따져보면 한 학교에 한 위원장 같은 독보적인 훈남 능력자들이 10명은 됐던 것 같다. 부러워했지만 우러러 볼 정도는 아니었고, 엄마한테 저 아이하고 친구에요 하면 안도해하시는 수준이었다.
기자처럼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층이 각 반 마다 의외로 폭넓게 포진돼 있었다. 문과에서 공부 잘했던 친구들 대부분은 법조인의 길을 갔고 이과에서는 아직 의대만큼이나 공대도 인기가 많았다. 시험 때 마다 강남역 국기원 도서관과 영동단과학원으로 여학생들을 보러 몰려갔고 명절 때면 동아극장으로 달려가 성룡 아저씨를 만났다. 강남 도처에 널린 동시상영 3류 극장을 습격할 때마다 홍콩 느와르 영화와 야한 영화가 함께 하는 지 습관처럼 확인했고, 압구정 로데오 거리와 갤러리아백화점, 교대 앞과 테헤란로를 수시로 배회하며 그야말로 한 껄렁 하던 시절이었다.
20살이 돼 강남을 벗어날 때까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지와 이해는 막연한 추상과 의무적인 배움 속에서나 견인됐을 뿐 진정한 실체로 접해본 적이 없다. 남한테 해 끼치지 말고 나하나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게 이 둥지에서 잉태된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관인데, 왜 정치를 해서 남을 위해 국가를 위해 살 생각을 했을까. ‘강남 좌파’식의 겉멋에 들려 그런 것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돼도 않은 사명감인가, 이도 아니면 해볼 것 다 해 본 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인 정치권력을 취하고자 했던 것일까. 곤궁한 여당의 처지에 예정된 등판이었지만 한 위원장의 여의도 입성 한편에 이런 저런 의문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영부인에 대한 국민적 비호감과 대통령만 모르는 특유의 아마추어리즘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한 위원장을 주연으로 총선에서 선전하고 싶은 여권의 마음이 간절하다. 아직은 막 귀국한 아이돌 스타가 공항 로비에서 팬들하고 악수하고 있는 단계라 그가 보여줄 깜냥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 아바타 프레임에서는 벗어날 것 같다. 아니, 이번 총선 공천권이야 사실상 대통령이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총선 후 김건희 특검’에 대해서는 확실한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야당은 물론 대통령과도 차별화돼야 4월 총선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고 설사 완패한다고 해도 대통령 내외가 원인일 수 있다.
기자의 취재를 종합하면 여권은 이번 총선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성적을 135석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것도 김건희 여사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됐을 때 얘기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 제일검들이 정조준 해서 몇 년을 털고 또 털었다. 특검을 한다고 뭐가 새롭게 나올 리 없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민주당이 특검 노래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결국 도이치모터스가 아니라 ‘디올 백’을 잡고 싶은 것이다. 두텁게 쉴드(shield)를 쳐야 한다. 또 한 위원장이 정말 사즉생(死則生)의 이순신 장군 경지에 올라 수도권과 낙동강 벨트에서 분전해야 한다. 장안에 사람 두 명만 모여도 여당은 강남과 영남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전멸할 것이라고 쑥덕거리고 있다.
그런데 만약 ‘한동훈 체제’로 총선에서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때도 국민들의 눈과 귀에 대통령이 들어올까. 한 위원장과 대통령이 어떤 한 몸이고 서로 얼마나 엮여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위원장이 먼저 보이는 세상에서는 다 부질없지 않을까. 국민들이 두 번씩이나 칼잡이들에게 권력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한 위원장도 대권의 길을 가게 된다면 이회창의 길을 가지 않을까. 그리고 진영은 이미 이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아직은 너무 이른 얘기일까.
‘한동훈 바람’에 고무된 정치 원로들과 각계의 훈수질이 난무하고 있지만 전례 없는 전직 여야 당 대표들의 탈당질에 제3지대의 확장성 전망만 무성해 몇 마디 보탠다. 진영 구분도 못하고 이기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여기 저기 누구도 잃기 싫고 잘 보여야겠다는 강박감에 애매모호한 ‘좌클릭’을 남발하면 ‘패션 우파’라는 철퇴만 맞게 된다. 외연확장은 한 위원장 개인기로 도모하는 것이다.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이라는 시대적 좌표를 찍었으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면 된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이념의 살의(殺意)와 광기에 끊임없이 물어뜯기고 난도질당할 것이다. 가보지 못한 길에 들어선 비용과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고 분연히 떨쳐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구업(口業)은 쌓지 마라. 말빚은 본인의 업장소멸(業障消滅)로도 다 갚지 못하고 결국 다음 대에 넘겨줘야 할 만큼 무거운 것이다. 매사 희망의 언어로 싸우고 어떡하든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으로 불러내려는 그 번다한 시비에는 가능한 멀리 도망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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