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공양이라니... 부끄러움 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라인권 2024. 1. 1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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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회복, 참 사람이 되는데 있다

[라인권 기자]

 하늘을 우러러 보는 스데반 모습과 증오로 이를 갈며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램브란트 화보집에서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다음 어학 사전의 종교에 대한 정의다. 이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그 종교가 타력 종교든 자력 종교든 종교는 인간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외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서 성경의 강령은 신인神人에 대한 사랑이며,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불심인 것이다. 종교가 이 종교의 본질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면 그 종교와 신앙은 비인격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인간성 상실은 타락한 종교의 특성이며, 인간성을 상실한 종교와 종교적 신념처럼 가공可恐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이 인류사의 증언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종교의 실상

바리새 종교가 그랬다. 안식일에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나오자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동정하거나 고침 받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의 병을 예수를 고발할 빌미로 삼아 그의 면전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예수께 물었다.

이 말과 그 분위기에 그 장애인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이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라곤 찾을 수 없는 비인간적인 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다며, 그 장애인을 고친 예수를 죽이려고 살인을 모의하는 악마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게 바로 인간성을 잃어 '돌처럼 굳은' 종교의 가공함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종교가 가공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신에 대한 헌신과 공로로 인식해 죄책이 없이 사람을 해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잃은 유대교는 죄책 없이 예수를 십자가로 보냈고, 인간성을 상실한 중세교회와 예수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방법으로 사람을 고문하고 불사르는 만행을 일삼았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킹은 "교회가 악마적인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종교와 종교인이 지탄과 조소의 대상이 된 것은 종교인들이 신神적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지 못해서이다. 종교에서 신령한 일이나, 영험이 없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이 인간적이지 못해서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형제복지원의 만행이나 근래의 정인이 사건, 광화문에서 살벌하게 증오의 정치를 선동하는 종교인들도 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종교인들은 너무 신적이어서 인간성을 상실한 셈이다.

충격적인 조계종의 발표
 
 대한불교 조계종 제33대, 제34대 총무원장 해봉당 자승 대종사의 분향소가 12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 마련되어 있다.
ⓒ 이정민
이런 때에 조계종이 총무원장을 지낸 한 승려의 죽음을 '소신공양'이라고 천명한 것은 충격 그 자체다. 이 사건을 조계종이 소신공양이라고 함은 "인신 공양"이 불도라고 천명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신 공양, 즉 인신 제물은 가증한 것이다. 인신을 제물로 삼는 비인도적인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구도건 수행이건 인격적이지 못한 것은 참된 종교가 아닐 것이다.

소신공양이 순교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해도 인격적 종교에서는 박해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다. 순교는 자결이 아니라 신앙 고백을 위하여 사악한 박해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승려가 사찰을 방화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것을 소신공양이라 칭하고 거기에 정부가 훈장을 추서하면, 베트남의 스님 틱꽝득의 소신공양이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부끄럽지 않을까.

조계종의 소신공양 입장이 더욱 충격인 것은 조계종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걸 스스로 천명한 셈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어찌 승려가 사찰에 방화하여 목숨을 끊은 사건을 만천하에 소신공양이라고 공표할 수가 있겠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이자, 자정과 자생력을 상실한 말기적 상태인 것이다. <유교경>의 "부끄러움으로 옷을 삼으면 위 없는 장엄이다" 는 부처의 가르침이 이를 이름이 아니던가.

이렇게 이 땅의 종교는 너무 신적이 되어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했다. 은사에 부족함이 없으나, 인간이 되지 못해서 거룩한 종교가 천해지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종교인들은 신적이 되려고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뽑으며 기도할 것이 아니라,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 소나무를 뽑아야 한다. 신령하고 영험하려고 수행할 것만이 아니라, 진솔한 한 인간이 되려고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신적 예수가 아닌 나사렛 사람 예수처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적이 되는 것은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도의 성불도 온전한 사람이 되자는 것 아닌가. 이 길만이 신을 닮는 신앙인이 되게 하며, 이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종교가 매력적인 것이 되게 하고, 경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거룩함은 신 앞에서만이 아니라, 죄인이며 중생에 불과한 한 사람에게서 고귀한 인간다움을 볼 때 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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